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伊溪). 경상도 의성현 신촌리(新村里)[현 경상북도 점곡면 동변리 월촌(月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남해준(南海準),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 권지(權誌)의 딸이다. 어려서 문장을 조달하여 문명이 있었다.
1642년(인조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1년(효종 2)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기용되고, 이어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을 거쳐 예조정랑(禮曺正郞)이 되었다. 1655년 김성일(金誠一)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뒤에 고성(固城)과 임실(任實)의 군수를 역임하면서 고을 수령으로 저질러서는 안될 일들을 모아 「거관불망기(居官不忘記)」를 지어 자신과 후임 관리들을 훈계하였다. 백성의 부세를 경감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666년(현종 7)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되었으나 예제(禮制)의 개혁을 상언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당해 파직되었다.
그 뒤 이계정사(伊溪精舍)를 지어서 후진을 교육하였다. 특히, 사학(史學)에 밝아 국조 이후 당시까지 역사적인 사실을 「동국통감부(東國通鑑賦)」와 「동국소승(東國小乘)」을 지어서 밝히고, 「기해예송전말(己亥禮訟顚末)」을 지어 숙종 초에 있었던 예론 시비의 근원을 밝혔다.
죽은 뒤 9년 만에 예제가 자기의 주장대로 고쳐지자 손자 남윤주(南胤胄)가 상언하여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이계문집(伊溪文集)』 1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