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의 문집 · 일기 및 관계 문서로, 문적에는 『노소재문집(盧蘇齋文集)』 · 『정사수록(呈辭手錄)』 · 『정청일기(政廳日記)』 · 『춘추관일기(春秋館日記)』 · 『광산노씨보략(光山盧氏譜略)』등이, 문서에는 매매문서 · 만사(輓詞) 등이 있다.
『노소재문집』은 전 7책 중 현재 1책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초고(草藁)로 을중본(乙中本)이다. 내용은 노수신이 을사사화로 순천 · 진도에 유배된 1547년(명종 2)부터 수년 간 유배지에서 쓴 시와 부(賦), 「무신정월난고(戊申正月亂稿)」 21수, 「이월난고(二月亂稿)」 40수와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 등이 있다. 서예에 뛰어난 노수신의 친필본으로 진도에서의 유배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사수록』은 노수신이 좌의정에서 영의정에 이르는 1581년(선조 14)부터 1588년(선조 21)까지의 정사를 수록한 것으로, 일국의 좌상과 영상에 있으면서 자진사퇴를 원하는 서장(書狀)과 정사가 74회나 된다는 것은 위정자의 귀감이 될 만하다.
『정청일기』는 노수신의 정청관계와 사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상권은 필자가 1571년(선조 4) 2월 초 2일부터 1581년 8월 30일까지 매일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고, 하권은 노수신이 영의정으로 있었던 1588년 정월 초 1일부터 1590년(선조 23) 3월 11일까지의 일기이다.
『춘추관일기』는 노수신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 수찬(修撰) ·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정언(正言)을 거치는 1543년(중종 38) 11월 22일부터 이듬해 10월 27일까지 춘추관에 관해 중요한 일만을 정리한 일기이다.
『광산노씨보략』은 광산노씨의 가첩식(家牒式) 보략으로 시조로부터 노수신 당대까지 도표식으로 되어 있다. 특히, 노수신이 좌의정으로 있었던 임진왜란 이전의 시기에 친필로 쓴 것이며, 친손과 외손을 거의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어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와 공통성이 있는 매우 중요한 연구 자료이다.
문서로는 노수신이 영의정 당시인 1586년(선조 19) 12월 15일 손자 도향(道享)에게 노비 · 토지 · 와가(瓦家) 등을 별급한 상속명문과 모부인(母夫人) 별세시(1581) 여러 인사로부터 받은 만사(輓詞) 1책 외에 1675년(숙종 1)의 전답매매명문 1장, 1611년(광해군 3)의 예장(禮狀) 1매가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 노응구(盧應九)가 소장하고 있고, 198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노수신은 환로에 들어선지 3년 만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2년의 긴 세월을 적거지(謫居地)에서 보냈다. 그러나 유배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그가 갖추고 있었던 천재적 문재(文才)는 시를 통해서 발휘되었고, 『숙흥야매잠해』등을 저술하여 당대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과 논변하였다. 『정사수록』은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이후 관직생활하면서 쓴 것으로 임진왜란 직전의 국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정청일기』는 의정부 요직 및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필자가 전후 14년에 걸쳐 정청관계를 기록한 방대한 축일식(逐日式) 일기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춘추관일기』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파쟁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