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

콤바인을 이용한 벼 수확
콤바인을 이용한 벼 수확
산업
개념
토지를 이용하여 작물을 재배하거나 동물을 사육하는 산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농업은 토지를 이용하여 작물을 재배하거나 동물을 사육하는 산업이다. 농경과 목축을 말한다. 인류가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를 시작한 것은 1만년 전 정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3천년 전 청동기시대부터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이후 전통적인 농업사회를 거쳐 19세기 후반에 서양의 근대적 농업기술을 접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농업구조는 왜곡되었다. 해방 후 농업의 근대화와 농가소득의 향상 및 식량증산을 통한 자급자족체제를 꾀하였으나,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국제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과제까지 떠안게 되었다.

정의
토지를 이용하여 작물을 재배하거나 동물을 사육하는 산업.
농업의 기원

농업의 시작은 동식물을 키우고 가꾸어, 식품용(食品用)·의료용(衣料用)·문화용(文化用)으로 쓰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다.

오로지 수렵과 어로생활을 하던 시대는 50만∼100만 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지만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로 인류문화 발전에 혁신적 계기를 가져오게 된 것은 1만년 전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다만, 현재 발상지역을 크게 나누어 구세계와 신세계로 보고, 전자에서는 중동지역·인도·동남아시아·중국·아프리카·유럽으로 세분하고, 후자에서는 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발상연대는 양자가 서로 비슷한 서기 전 6000년 전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작물의 흔적으로는 서기 전 7000년으로 소급할 수 있는 밀과 그보다 약간 뒤에 재배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수수류와 조류·기장류 등이 있고, 인도에서도 조와 기장이 발굴되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속하는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많이 연구되어 있으나, 발견된 식물성유물(食物性遺物)은 서기 전 4000년대의 것으로 보여지며, 주곡은 조[粟]였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타이에서도 쌀 등 식물유체(食物遺體)가 발견되었고, 중국 남부에서도 탄화미(炭化米)가 나오고 있는데, 그것들도 중동지역의 것들과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페루 해안지대에서 식물유체가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데, 옥수수(서기 전 6000년)·스쿼슈(서기 전 3000년)·라이마빈(서기 전 6000년) 등이 그 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농업문화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식량으로 삼고 있는 곡식들은 주곡·잡곡 할 것 없이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것들은 거의 모두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남아시아 원산인 쌀, 중동지역에서 재배된 밀과 보리, 인도에서 재배된 피·조·기장, 그리고 아프리카의 수수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농업문화권을 만주지역으로 연결시켜 보면 별도 발상지역을 생각할 수도 있다. 콩·배추·복숭아 등을 한반도·만주·북중국 일대에서 그 발상을 찾는 설도 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농업

신석기인들은 이전에 채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과실류·근경류, 화본과식물의 곡류 등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에 일어난 농업기술상의 큰 변화는 그들이 사용하던 도구를 통하여 추적할 수 있다. 원시적 경작기구의 모습은 유물이나 현존하는 미개종족의 용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농경구(農耕具)는 굴봉(掘棒)이었을 것이다. 굴봉이 발달하여 더욱 능률적인 괭이나 또는 가래가 나타나고, 그것이 다음에는 쟁기로 발달한다. 괭이농경에서 쟁기농경으로 진전하는 과정에 삽(鍤)의 사용단계가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원시형 쟁기라 볼 수 있는 뇌사(耒耜:쟁기술과 보습)이다.

쟁기술은 굴봉에 해당하며, 보습은 석제·목제·금속제로 된, 밭을 가는 부분이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에 청동제 보습을 단 뇌사를 썼다 하는데, 당시의 재배작물은 조·기장·밀·보리·콩·쌀 등이고, 철제농구는 전국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뇌사에 해당하는 따비가 있었다. 지금도 서부·남부 섬지방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것으로 말굽형·코끼리형(쌍따비)·주걱형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술과 발판 그리고 쇠보습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따비에 관한 옛 기록은 『삼국유사』 유리왕조에도 나오고 따비의 유물(보습)도 더러 나왔으나, 1970년 대전에서 발견된 청동의기(靑銅儀器)에 나온 그림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 청동의기는 청동기시대(서기 전 7∼3세기)의 유물로서, 뒷면의 그림에 따비로 밭을 가는 사람과 괭이로 흙을 파는 사람이 있다. 이 따비는 얼마 전까지도 제주도에 있었던 쌍따비와 똑같은 것으로, 발판을 밟고 밭을 가는 모습이 거의 같다.

이 그림으로 보아 당시(마한시대)의 농경이 주로 밭농사였음을 말해 주는데, 따비와 괭이가 밭갈이 농기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잡곡은 밭에서 나는 곡물로서 농경 초기부터 오랫동안 주곡류를 이루어왔다. 그것은 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입증된다. 탄화물(炭化物), 토기에 나타난 자국, 수수껍질·보리껍질 등과 같은 유물이 석기·토기·용범(鎔范) 등과 함께 출토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과 기록들로 보아 피·기장·조 같은 알이 작은 곡식이 초기의 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은 알맹이의 곡류가 초기의 주요 재배작물로서 밭에서 가꾸어져 수확, 탈곡, 제분되었으며, 밭을 가는 도구로는 괭이와 따비를 주로 썼을 것으로 보인다.

작은 알맹이의 곡류를 뒤쫓아 들어왔을 것이라 보이는 맥류는 선구곡물(先驅穀物) 가운데 특히 조와 함께 이른바 속맥문화(粟麥文化)를 오래 누렸다고 본다. 그것은 중국의 화북지방이나 한반도에도 같다.

『삼국사기』에는 5, 6세기까지 조나 보리에 관한 기술이 농사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맥류의 발굴유물로는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 선사주거지에서 탄화미와 함께 나온 보리껍질이 있다.

맥류가 들어온 것에 이어서 벼를 재배하게 된 것도 중국대륙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대륙의 어느 지역에서 어느 길을 통하여 우리의 어느 고장으로 들어왔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북방설·남방설·절충설 등 이론이 많았으나 요즈음 잇따라 출토되는 쌀의 유물로 북방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즉, 1976년에 여주 흔암리에서 서기 전 1000년으로 추정된 탄화미가 발굴되었고, 이어서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출토되었다.

그 뒤 1981년에 평양시 남경유적(南京遺蹟)에서도 비슷한 연대의 탄화미가 다른 잡곡과 아울러 발견되었다 한다. 또 전라남도 나주에서 채취한 화분(벼꽃가루)을 분석한 결과도 약 3,500년 전의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벼의 재배가 적어도 3천년 이전에, 즉 청동기시대에 이미 우리 땅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경로도 북쪽을 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상고시대의 농업

고고학적으로 철기시대의 완숙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 무렵 청동제는 물러나고 철기가 두루 보급되어 낙동강하구에서는 철생산이 활발해져 낙랑과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게 되었다. 따라서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나 대동강 기슭의 낙랑군·대방군은 야철(冶鐵)과 아울러 철제농구의 사용이 점차 활발해졌을 것이다.

이때 한강 하류의 충적평야는 농경지로서 석기시대로부터 주거지를 이루었던 중 양평 대심리에는 초기의 야철 유적이 나왔고 남양주의 덕소, 서울의 암사동·풍납동에서 김해토기(시루 포함)가 출토될 만큼 이 지역에 문화발달과 농경술의 진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진한이라는 사회에 부여일족이 세운 백제는 비교적 넓은 평야와 비옥한 토양과 수리시설에 알맞는 하천이 많아 농업국가의 면모를 나타내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다루왕 때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고, 기루왕 때 큰비가 10일간이나 내려 한강이 넘쳐 논밭이 훼손되는 등 수해를 입은 전답을 보수하도록 하였으며, 벽골지(碧骨池)를 새로 열었다는 기록으로도 벼재배가 중요시됨에 따라 관개공사와 치수공사가 국가의 사업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한인지(韓人池)·백제지(百濟池)의 기록은 백제의 수리기술이 일본에까지 전해진 것을 말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4, 5세기까지도 맥류가 주작물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벼의 재배가 상당히 보급되고 수리·치수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둑이 얼마나 많았던가는 지명과 인명에서 많이 찾을 수 있고(彌凍: 물독, 吐解: 뚝캐 등), 논을 뜻하는 답(畓)자의 신조(新造)가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창녕비(昌寧碑)에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 쇼소원[正倉院] 소장의 통일신라시대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촌주위답(村主位畓)’·‘내시령답(內視令畓)’·‘연수유답(烟受有畓)’ 등 직전(職田)·구분전(口分田)의 종류가 기재되어 벼재배가 주작화(主作化)되어가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536년(법흥왕 23)에 건조되어 798년(원성왕 14)에 보수하였다는 지금의 영천에 있는 청제(菁堤)의 비문(碑文)인 798년의 정원명(貞元銘)에는 보(洑)와 둑을 관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국가에 의한 수리사업이 벼재배의 뒷받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 일대의 고분에서 때때로 출토되는 여러 가지의 철제농구와 벼껍질·탄화미 등도 이를 증명해 준다. 이와 아울러 기록에 나오는 쟁기와 황우가 흙을 간다는 우경(牛耕)의 이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신라의 농업은 경작기술뿐만 아니라 농가의 민속까지도 오늘날까지 전하여 내려오는 것이 많다. 이른바 명절이라 하여 설·정월대보름·오월단오·칠월칠석·팔월한가위·시월고사 등은 그 원천을 신라에 둘 수 있는 것들이다.

고려시대의 농업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한 고려는 전제(田制)의 개혁과 부세(賦稅)의 조정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농상(農桑)을 장려하여 농산증진에 주력하였다. 한편 감세(减稅), 농기구의 급여, 종자의 배포, 경우(耕牛)의 대여 등으로 민심을 무마하면서 국고수입을 보충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와 민생의 궁색이 점차 노출됨에 따라 국고수입대상의 증대요청과 아울러 토지의 확대를 절실히 요망함에 이르렀다.

즉, 생산력(농민과 가축) 증강의 상대는 토지의 팽창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라의 강토를 거의 차지하게 된 고려로서도 부단히 북방으로 평면적 신장을 꾀하였고, 내부적으로는 입체적 확대, 즉 개간을 적극 권장하였다.

대외적 평면신장은 다분히 위험한 모험과 병력의 소모를 수반하므로 대내적인 경지확대는 풍부한 노동력으로 쉽게 수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현종 때와 광종 때와 같이 개간의 특전과 그 조세와 소작료를 규정함으로써 진전(陳田) 개척욕을 북돋워주고, 그 결과 치전(治田)이 적극적으로 산간에 진출하여 멀리서 보기에 마치 사다리와 같을 정도로까지 되었다고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적고 있다.

간전사업(墾田事業)에는 많은 노동력을 요하는 동시에 기술면, 특히 농기구와 수리(水利)에서도 혁신을 요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도 각 주군(州郡)의 병기를 덜어내어 농기구를 주조하였으며,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농구가 송나라의 그것들과 대동소이하다고 한 것을 보면 농구의 대량생산과 개량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리면에 있어서 간전사업이 활발해지고 벼재배가 보급됨에 따라 매년 겪은 한수재(旱水災)에 대하여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록에 있는 바와 같이 장정과 병졸을 동원하여 제방의 개축 또는 증축에 힘썼다. 이들 저수지의 대부분은 하천의 상류를 가로막아 흙과 돌로 둑을 쌓는 식으로 만들어졌으나 때때로 소택지(沼澤地: 늪과 못)를 파서 둑을 쌓는 경우도 있었다.

권농정책의 전면적 진전에 따라 문종 때에는 각 도에 권농사(勸農使)가 파견되었고, 다음에는 이것이 강화되어 명종 때에는 안찰사·감창사(監倉使)가 그것을 겸하였으며, 이어서 충렬왕 때에는 중앙에 농무도감(農務都監)이 설치되었다.

한편으로는 친경적전(親耕籍田)을 맡아 종묘제(宗廟祭)에 쓰는 쌀을 바치는 기관으로 사농시(司農寺)가 있어 권농의 본령을 발휘하였다.

고려 전성기의 중농정책은 국가재정으로나 국민경제의 수입과 지출의 근원으로도 쌀과 옷감을 화폐의 대신으로 할 만큼 강행되어 지방의 고관도 권농관 겸 징세관인격이었고 토지반급제(土地班給制)·녹봉제 및 창제(倉制)의 확립과 함께 미곡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는 큰 창고의 미곡이 묵어서 붉은 곰팡이가 생길 정도로 자족자급하는, 살림이 넉넉한 백성들의 다스림을 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도경』에도 각 창고에 쌓인 쌀이 굉장하여 병란과 홍수와 가뭄에도 항상 대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재배곡식에는 벼 외에 종래의 보리·밀·조·기장·수수·피·귀리·콩·팥·녹두 등이 있었고, 밭곡식은 고려 초부터 2년3작식인 윤작법(輪作法)으로 재배되어왔으며, 채소류로는 오이·가지·무·순무·파·박 등이 많이 가꾸어져 생식 외에 조리·김치 등 가공식품으로 애용되었다고 이규보(李奎報)는 『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 말하고 있다.

임목(林木)으로는 성종 때 각 도(道)·주(州)·현(縣)에 영을 내려 토양이 경지로서 적당하지 않을 때 뽕나무·밤나무·옻나무·닥나무 등을 심도록 장려하였고, 인종 때에는 이러한 나무들을 다른 과일나무들과 함께 권장하였는데, 이 임목들은 잠업·칠기·제지원료로서 당시의 견직류·종이류, 기타 공예품 제조의 융성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의류는 그 원료가 주로 삼·모시 등과 명주실이었으므로 삼·모시·뽕나무의 재배가 활발하였다. 특히, 모시제품은 외국에까지 성가(聲價)를 떨쳤고, 비단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달하였다.

그 뒤 고려 말기에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서 얻어왔다는 목화씨와 씨아[攪車]·물레 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축산, 특히 말사육은 몽골이 침입하기 시작한 12세기부터 피동적인 성황을 띠게 되었다. 몽골은 농우·군마와 그 먹이를 다른 군량과 함께 강제징발하게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동북변경 너머의 여진족의 위협도 있어 군마의 양육이 촉진된 셈이다. 농우의 징발은 때때로 농민의 분격을 사기도 하였다.

마필의 번식은 북방에서 종마를 얻어 직접 국가에서 관리했으며, 마별초(馬別抄)라는 무반도 생겼고 교통과 체신의 구실을 맡은 역마제(驛馬制)도 있었다.

목마사업은 제주도·함경도 그리고 남해의 섬지방에서 활발하였으며, 더 나아가 몽고말의 마종계획(馬種計劃)도 세웠던 것이다.

그 때의 목마사업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는 얼마 전까지도 전하여오던 말의 품종명의 수효와 제주목사(濟州牧使)·제주말총 및 그 제품의 다양함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려의 목마사업은 너무나 국가적 통제에 치우친 나머지 말기에 와서는 국내혼란으로 인하여 관리의 해이, 목장의 황폐, 마필의 이산 등을 보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농업

조선 초기 농업정책의 핵심으로 전제의 개혁을 내세우고 새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토지제도의 개정과 아울러 그에 부수하는 세제의 강화, 그리고 여러 방면의 권농정책과 수리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태종 때에는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벽골지의 중수를 명하였으며, 농잠서(農蠶書)의 번역 및 간행도 있었다.

세종 때에는 측우기의 발명, 역서(曆書) 간행, 『농사직설(農事直說)』의 반포, 『구황벽곡방(救荒辟穀方)』의 간행 등이 있어 농업기술향상에 공헌이 컸다.

문종 때에는 수리(水利)·방천(防川)·저수(貯水) 등의 계획이 있었고, 단종 때에는 마목장(馬牧場)의 설치와 잠종 배부의 거사가 있었으며, 세조 때에 와서는 양잠장려, 제언(堤堰)의 수리, 농서의 간행, 축산장려 등 여러 가지 실천이 있었다. 뒤이어 성종 때에도 교서발포와 친잠(親蠶) 등 양잠장려, 농기구제조 등 권농사업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의 농정은 자못 활기를 띠어왔으나 연산군 때의 실정(失政)을 계기로 농정의 문란이 눈에 띄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중종 때에 가서도 제언은 황폐한 것이 많아 개수를 엄명하기도 하였으며, 각 도에 버려진 아이가 많아 거두어 기르기를 명하기까지 하였다. 중종 때에는 권농교서가 자주 나왔고 농잠서의 언해(諺解) 간행, 그리고 향약법(鄕約法)의 제정이 있었다.

대체로 보아 조선 초기의 활발상은 집권의 강화와 재정확보를 위한 토지제도 및 그에 따르는 세제의 확립과 아울러 농본주의를 뒷받침할 권농책의 조밀한 강구에 힘입은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빈번한 흉농에 대한 대책도 적지 않은 과업이어서 의창제(義倉制)·사창제(社倉制)·진휼청(賑恤廳) 같은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쌓아두는 저곡제도(貯穀制度)와 진대제(賑貸制)가 있었으며, 흉년의 대용식 조리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구황벽곡방』 등 언해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종 때의 과학기술진흥은 직접·간접으로 농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칠정산(七政算)』 내·외편으로 확립된 역법의 실시와 측우법(測雨法)의 개발은 농사지도와 수리사업에 직결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각종 농서와 문헌으로 볼 때에 당시의 벼재배는 건삶이[乾耕: 乾畓直播法]·무삶이[水耕:直播法]·모내기법·밭벼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무논에 볍씨를 직접 파종하여 벼를 기르는 법과 마른 논에 파종하여 마치 밭벼와 같이 벼모를 가꾸다가 장마 때에 물을 가두어 무논에서와 같이 재배하는 건답법이 많이 행하여졌으며, 모내기법은 별로 보급되지 않았다.

모내기는 벼재배면적의 10분의 1을 묘판, 즉 못자리로 만들어 가려낸 볍씨를 뿌려 모를 키우고, 모를 낼 때에는 포기당 3, 4낱모를 넘지 않게 하였으며, 뿌리를 내릴 때까지 물을 깊이 대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곳이나 물이 찬 곳에는 밭벼를 권장하였으며, 실농을 막기 위하여 피와 팥과 함께 혼작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밭작물의 경작방식으로는 2년3작·홑짓기·섞어짓기·사이짓기 등이 작물·토질·기후에 따라 적절히 채택되었다. 밭곡식으로는 기장·조 등을 혼합하여 줄뿌리기 또는 막뿌리기 등 견종법(畎種法: 이랑과 이랑사이 골에 씨앗을 뿌리는 방법)을 썼으며, 거름으로는 재거름을 많이 썼다.

보리·밀 등의 파종은 밑거름에 유의하여 재거름과 숙분(熟糞)을 썼는데 앞그루가 조나 콩이었을 때에는 그 짚과 줄기를 깔아 태운 다음에 씨를 뿌리거나 또는 녹두를 재배하였다가 엎어갈아 부숙시킨 뒤에 파종하였다.

뒷거름에는 봄·여름 사이에 버들가지를 잘게 썰어 외양간에 깐 지 5, 6일 뒤에 꺼내어 퇴적했다가 쓰면 맥류에 매우 이롭다고 하였다. 콩 종류에는 올콩과 늦콩이 있는데 올콩은 봄갈이, 늦콩은 그루갈이를 하였다.

그루갈이는 맥류의 수확이 끝난 뒤 또는 거두어들이기 조금 전에 고랑 사이에 파종하는 것인데, 가을에는 콩 두렁 사이에 다시 맥류를 파종하였다. 콩에는 거름이 적은 편이 좋고 씨뿌릴 때에는 매 포기당 3, 4알이 넘지 않도록 점뿌림을 하고 꽃이 필 때에는 호미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

주요 작물에 있어서는 지방별로 많은 수의 품종이 재배되어 그 특성 및 장단점이 파악되고 알맞은 지역과 익는 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농기구도 현재 볼 수 있는 재래농구 이외에 지금은 보기 어려운 따비·끌개·번지·제초기 등도 사용되었다. 비료로는 두엄·외양간두엄·인분·우마분·잠사(蠶沙)·녹비(綠肥) 등이 사용되었으며, 질고 물이 찬 땅에는 객토를 하였다.

각 작물의 품종·명칭에 중국명이나 일본명에서 유래한 듯한 것이 적지 않음을 보면 외국에서 우량품종을 도입하고 시험하여 이 땅에 알맞고 좋은 것을 골라 보급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도 농경기술을 북쪽으로 전파시키려고 애쓴 일이 있었다. 그 일례로 벼재배와 목화재배를 평안도·함경도의 국경지대에 시험재배를 꾀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의 과목류에는 능금·앵두·대추·배·감·유자·귤·석류 등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많은 것이 진상품으로 재배가 장려되었다. 감귤류로는 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감자(柑子)·금귤(金橘)·유자 등의 여러 가지 품종이 있었다.

고려 말에 도입된 목화는 그 조사(繰絲) 등 방직법과 함께 관심을 가진 인사들의 연구결과로 발달이 신속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명의 보급이 활발해졌다.

목화재배의 필요 노동력이나 수확량, 그리고 실 만들기의 편리성 등으로 보아 베나 명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빛깔과 견고성도 월등하여 우수한 경제작물로 기반이 굳어졌다. 백색무명은 보급도 빨랐지만 정부의 징수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며, 통화로도 쓰이게 되고, 또 가장 중요한 무역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무명의 징수는 태종 때 시작하여 대를 거듭할수록 강화되어 연산군 때에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면포의 정치적·경제적 위치로 하여 목화재배의 강력한 장려와 경지의 확대(개간 등)가 이루어졌다.

당시 무명의 생산이 없었던 일본에 면포가 무역품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것은 태종 때이며 중종 때에는 절정에 달하였다. 따라서 목화재배의 장려는 역대 왕의 큰 관심사가 되었다.

세종 때에는 평안도·함길도에 명하여 관가에서 경작하게 하였고, 성종 때에는 삼남(三南)의 목화씨를 평안도·황해도에 나누어보내 적합한 땅에 재배하게 하였으며, 또 당면종(唐棉種)을 얻어 경상도·전라도로 보내어 심게 하였다. 농업증산과 경지의 확대는 농기구의 발달을 이룩하였고, 따라서 축력(畜力) 사용을 더욱 요청하였다.

즉, 소와 말의 증식이 요구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전용(戰用)·역용(驛用)·승용(乘用)·수렵용·무역용 등의 목적으로 특히 목마(牧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고려시대에 힘썼던 목마사업은 조선시대에 와서 계승, 조직화되었다. 즉, 159개소의 각 목장에 각기 100필 이상의 암말과 50필 이상의 수말을 책임지고 확보하게 하였으므로 전국 공목장(公牧場)에서 약 2만 4000필 이상의 말을 유지하고, 또 매년 각 군에서는 이상과 같이 산출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방대한 목마사업은 엄격한 관리와 상벌로 강행되어 일반국민에게 육식금지·승마금지·매매금지 등의 금법(禁法)과 아울러 마량조달 등 심한 부담을 부과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60여 종이나 되는 말의 품종별 관리와 보호, 품종개량, 마의(馬醫) 양성, 마초(馬草) 생산에 큰 힘을 기울였다.

조선 중기의 농업

조선 중기의 농업에 있어서 정부의 대책은 진휼, 대동미포(大同米布) 반감, 군보미(軍保米) 삭감, 진상(進上)을 줄여주고, 저수지나 둑 등을 논· 밭으로 일구게 허용, 담배경작 금지, 양조금지 등 응시적(應時的)인 것들에 급급하였다. 더욱이 중기 후반부터 성숙하기 시작한 자아의식의 확대와 실용후생의 학풍은 농정면 또는 농업기술면에 비판의 눈을 돌리게 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 가운데의 전제(田制)를 중심으로 하는 농론(農論)은 그 백미(白眉)에 속한다. 임진왜란 중 또는 난후의 중국·일본과의 통교(通交)에 따라 몇몇 외래작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

아메리카대륙 원산인 고추·호박·담배 등의 세 가지 작물이 선조·광해군 때에 일본 또는 중국에서 도입되어 신속하게 보급됨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서 재배되었다.

호박은 식량에 보탬이 되는 데다 가꾸기가 쉬우며, 고추와 담배는 일반인의 기호에 맞아 그 재배 보급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의 확산을 가져왔다. 고추는 우리 식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담배는 전업작물(專業作物)로서 경제적인 위치도 확보하여갔다.

한편, 조선시대 초기의 농서들과 중기의 농서들을 비교해 보면, 농민들의 역생활(曆生活)이 24절기 중심으로 굳어져온 것을 알 수 있다.

즉, 태양의 운행을 정확히 계산하여 1년의 길이를 정하고, 그것을 24등분하여 24절기라 하고 농경에 필요한 계절변화를 지표로 한 것이다. 「농가월령가」의 내용을 절기별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입춘(立春): 섣달에 물에 담가두었던 가을보리를 바깥에 놓아 얼게 한다(봄에 파종할 것). 농기구(쟁기·삽·후치·써레·번지 등)를 갖춘다.

② 우수(雨水): 비온 다음날에 띠와 솔새를 베어 도롱이를 만들고, 뜰 안팎의 잡초를 태워 재를 만들어 재거름으로 하여 보리밭 봄갈이에 쓴다. 얼음이 풀리면 봄보리를 파종한다.

③ 경칩(驚蟄): 절내(節內)에 봄보리를 다 뿌리도록 한다. 콩·들깨·수수·삼을 파종한다. 망전(望前)에 과목·잡목을 심고 홍화(紅花)와 쪽[藍]과 담배[南草]를 파종한다.

④ 춘분(春分): 묵은 땅을 쟁기로 갈아 기장·조·메밀·목화 등을 파종한다. 닥나무·청포를 심고 가을보리밭을 매고 두렁 사이에 콩이나 조를 심는다.

⑤ 청명(淸明): 올조·올기장을 건조한 땅에 심고 올벼를 파종하며 목화씨를 뿌리고 보리밭을 간다.

⑥ 곡우(穀雨): 목화씨를 뿌리며 참깨를 섞어 심는다. 습한 땅에는 율무를 파종하고, 잠박(蠶箔)을 만든다.

⑦ 입하(立夏): 중생도(中生稻)를 파종하고 삼밭[麻田]을 다시 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천수답에서 건답직파한다.

⑧ 소만(小滿): 이 절내에 늦벼를 모두 파종하고 목화밭을 초벌갈이 하며 올조와 이른콩의 김을 맨다. 올벼의 모내기를 한다.

⑨ 망종(芒種): 도리깨를 고치고 조밭을 두벌갈이하며, 들왕골을 베어 자리 짤 것을 마련한다. 비온 뒤에 담배모를 모종한다. 중생벼의 모를 낸다.

⑩ 하지(夏至): 보리를 급히 거두어들이고 그루갈이로 우선 콩이나 팥을 심되 그 다음에는 기장·조를, 그리고 그뒤에는 녹두를 심고 들깨를 모종한다. 늦벼의 모를 내고 목화밭의 김을 맨다.

⑪ 소서(小暑):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 외양간에 넣는다. 비온 뒤에는 돌삼[山麻]을 베고 목화밭의 김을 맨다.

⑫ 대서(大暑): 올기장·올조를 거두어들이고 그루갈이로 메밀을 심는다.

⑬ 입추(立秋): 입추 후 4, 5일경에 메밀을 심고 삼밭에 무씨를 뿌리며, 목화밭의 김을 여섯번째로 맨다. 그루밭에 콩과 조를 파종한다.

⑭ 처서(處暑): 올벼를 거두어들이고 잡초와 버들가지를 베어 잘게 썰어 외양간에 넣는다. 목화밭을 일곱차례째 맨다. 참깨를 베어 처마에 매달아 말려 씨를 거둔다.

⑮ 백로(白露): 절초에 배추와 상추를 심고, 산중의 잡초와 참갈가지를 베어 잘라 쌓아두어 겨울과 봄에 외양간에 넣는다.

⑯ 추분(秋分): 가을보리를 파종하는데, 그루갈이 곡식이 수확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한로절(寒露節)에 파종해도 좋다. 중생벼를 수확하고 갈풀도 많이 베어둔다.

⑰ 한로(寒露): 꼴풀을 베어 마르면 쌓아두어 겨울 동안 소·말을 기르는 데 쓴다. 잡초와 참갈가지를 베어둔다.

⑱ 상강(霜降): 들깨의 이삭이 거뭇해지면 곧 베어 씨를 채취한다. 칡을 베어서 밧줄을 만들고 닥나무잎이 떨어지면 베어 쪄서 껍질을 벗긴다. 껍질은 종이를 만들고 속의 큰 것은 울타리를 만들 수 있고 가는 것은 짤 수 있다.

⑲ 입동(立冬): 추수가 이미 끝났으니 우선 움을 만들고 울타리를 보수하며 창호(窓戶)와 벽을 살펴본다. 갈대와 물억새를 베어 다음해 봄에 쓸 잠박을 만든다. 메주를 디딘다.

⑳ 소설(小雪): 볏짚을 도리깨로 두드려 남은 곡식을 회수하고 무논에 갈풀이 무성하면 이 달에 반갈이[反耕]함이 좋다. 억새풀을 베어 날개(이엉)를 만든다. 숯을 굽는다. 비온 뒤 목화밭을 반갈이한다.

㉑ 대설(大雪): 비온 뒤에 띠와 솔새를 베어 밧줄이나 도롱이를 만드는 데 쓴다.

㉒ 동지(冬至): 움 또는 토굴을 만들고 멍석을 짜며 날개를 엮는다.

㉓ 소한(小寒): 멍석을 만들고 이엉을 짠다.

㉔ 대한(大寒): 가을보리를 물에 담가두고 농기구를 간수한다. 섣달의 눈을 항아리에 넣어 얼지 않게 두었다가 봄보리 파종 전에 담갔다 쓰면 밀·보리가 황증(黃蒸)에 걸리지 않는다.

농업기술의 변천을 보면, 효종 때에 간행된 『농가집성(農家集成)』은 증보된 『농사직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세종 때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지경법(地耕法)에 있어서 메마른 밭에 녹두를 키워 무성하였을 때 엎어갈면 잡초와 해충이 적어지고 밭이 기름지게 된다고 녹비사용을 권장한 것이 추가되어 있다.

또, 증보된 조도앙기항(早稻秧基項)에서는 영남과 기타 남도의 행법을 많이 소개하되 재와 분(糞)의 용법, 사질토(砂質土)에 대한 유의사항, 앙초(秧草), 즉 참갈·억새풀 기타 잡초를 외양간즙액·인뇨 등에 처리하여 퇴적한 것의 사용 등을 논하였다.

그리고 화누법(火耨法)이라 하여 논에 건초를 깔아 태우고 관수하는 제초법도 소개되어 있고, 벼모의 이앙이 늦어 파리오줌병이 생겼을 때에는 건초를 두껍게 덮어 적당히 성장하였을 때에 모종을 하라고 하였다.

기장과 조의 재배에서 줄기[莖節]가 너무 무성하면 우경(牛耕)하여 흙으로 줄기를 덮어주면 새로 뿌리가 나서 열매가 좋아진다는 것도 부가되어 있다.

그리고 『농가집성』에는 종목화법(種木花法)이 수록되어 있는데 목화를 참깨·청태(靑太) 사이에 사이짓기하는 것은 목화에 손해를 준다 하여 전업자(專業者)는 목화를 홑짓기하는 것이라고 논하였다. 목화의 적지(適地)로는 건조한 모래토양을 권하고 있다.

이 밖에도 『농가집성』에 수록된 목화재배법의 내용은 상세하여 택지(擇地)·종자처리·씨뿌리기·거름주기·김매기·순치기 등 재배상의 기술이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경상좌도에서는 습한 밭에도 목화경작을 하고 있다 하였으니 건조한 모래토양 원칙에서 벗어나 진일보된 기술도 있었던 것 같다.

「농가월령가」에 따르면 가을보리를 냉동처리하여 봄에 파종할 수 있게 하는 기술(현대용어로는 春化處理)이 있었으며, 벼에는 조(早)·중(中)·만(晩)의 익는 시기별 품종이 있어 각기 파종·이앙·수확의 시기와 방법이 잘 구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맥류의 그루갈이에도 윤작의 순서가 잘 짜여 있어 조·기장·수수 등과 콩류의 안배가 묘하게 되어 있다. 거름의 준비에 있어서도 인분뇨·외양간거름은 물론 재의 마련 및 두엄과 녹비의 제조를 위한 가지가지 풀과 잎의 수집과 활용 등 용의주도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목화재배에서는 전업(專業)을 위한 집약재배가 논술되어 있다. 다른 특용작물로 염색용 작물과 제지용 작물인 닥나무 등의 재배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담배의 파종·모종이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기호작물이 얼마나 신속히 이 땅에 보급되었는가를 암시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농가의 필수용품인 밧줄·멍석·이엉·잠박·도롱이·뱁댕이 등의 제조를 위하여 수시로 띠·갈대·물억새·돌삼 등 야생잡초를 십분 활용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당시의 채소류 및 과일류의 재배상황을 허균(許筠)이 지은 『도문대작(屠門大嚼)』의 관계부분과 다른 농서들을 참고해 살펴보면, 채소류로는 오이·가지·마늘을 비롯하여 무·아욱·부추·염교·미나리·배추·갓·토란·생강·파 등이 많이 재배되었고, 고려 때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수박과 참외 등도 각기 명산지를 이루고 있다.

과일류로는 강릉에서 돌연변이종인 배를 얻어 키웠는데 크고 단맛이 있으며 육질이 연하였다는 천사리(天賜梨)와 정선의 금색리(金色梨), 평안도의 현리(玄梨), 석왕사의 홍리(紅梨)·대숙리(大熟梨) 등의 배, 온양의 조홍시(早紅시), 남양의 각시(角시), 지리산의 오시(烏시) 등 감, 황도(黃桃)·반도(盤桃)·승도(僧桃) 등 복숭아, 그리고 당행(唐杏)·자도(紫桃)·녹리(綠李) 같은 자두류가 있었다. 밤·대추가 각지에서 생산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려 때부터 전통이 있던 감귤류로는 금귤·감귤·청귤(靑橘)·유감(柚柑)·감자·유자 등이 제주를 위주로 하여 서남해안에서도 산출되었다.

이들 이외에 우리나라에서는 능금(지금도 있음)이라는 소형 과일이 있어,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는 ‘핏부’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그 뒤에 임금(林檎)의 음을 따서 ‘능금’ 또는 ‘님금’이라 하였는데, 이보다 대형인 사과(査果, 또는 苹果)가 효종 때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날 ‘사과’라고 하는 것은 한말에 들어온 서양사과를 가리키는 것이다. 축산방면의 모습은 효종말에 간행된 『목장지도(牧場地圖)』에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을 겪고 병자호란까지 거친 직후의 목장의 마필은 3분의 1로 줄어든 비참상을 나타냈는데, 그 뒤의 복구노력이 얼마나 컸던지 효종말 당시 마필의 수효가 2만 필이 넘었다. 물론 목장은 폐지된 곳이 많았다.

조선 후기의 농업

조선 후기 농업정책은 영조 때에 제언당상(堤堰堂上)을 두어 모경자(冒耕者:임자의 승낙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를 과죄(科罪)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제방을 개수하며 수차(水車)를 제조, 보급하는 등 수리정책에 힘을 썼다.

균역법을 베풀어 일반민의 납세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었고, 그 보충은 어염세와 은결(隱結: 탈세를 목적으로 조세의 부가 대상에서 제외시킨 땅)의 과세로 이루었다.

권농의 교서가 빈번하였고, 『농가집성』·『구황촬요(救荒撮要)』 등 서적의 중간이 있었으며, 옥토에 담배가 과하게 재배되므로 그것을 금하기도 하였고, 우역(牛疫)이 창궐하여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게 되므로 소 잡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으며, 측우기를 각지에 나누어준 때도 있었다.

정조 스스로 농정에 유의하여 제언의 개축, 제언절목(堤堰節目)의 전국 반포, 새로운 제언(萬年堤·祝萬堤 등)의 축조가 있었고 권농행사가 많았으며 농서를 널리 구하기도 하였다.

헌종 때에도 권농윤음(勸農綸音)이 내리고 각 도에 제언수축의 공사가 있었으나, 큰 가뭄과 흉년이 잦아 모를 내지 못한 논에 다른 곡식을 심는 일과, 모내기 금지의 안(案)이 대책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황폐하여 방치된 땅의 경작을 장려하여도 비옥한 전답마저 많이 폐기되고 감히 개간할 의사도 보이지 않았으며, 어쩌다 맞는 풍년에도 영세민의 고생은 오히려 흉년 때보다 못하지 않았다.

여러 해 체납된 환곡과 신포(身布: 평민의 身役 대신에 바치던 무명이나 베), 그리고 부역에 대한 독촉이 성화 같아 1년 소작의 곡식이 모조리 상납되는 참경을 빚어내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이때부터 척신에 의한 세도정치가 점점 심하여가면서 관기(官紀)의 부패는 더하여가고 국민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게 되었다. 철종 때에는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절정에 다다랐다.

1600년대에는 실학의 풍조가 성숙하기 시작하여 이것이 농업연구면에도 반영되고 적지 않은 농정서와 농업기술서가 저술되었다. 1700년대에 들어서는 정상기(鄭尙驥)의 『농포문답(農圃問答)』이 나왔고, 이어서 『반계수록』이 저작 후 100년 만에 간행되었다.

정조 때에는 강력한 권농정책 아래 농서의 대대적인 모집이 있어 그 중에서도 북학파의 석학들이 농업면에 보여준 관심은 괄목할만한 일이다.

농업면에 탁견을 보여준 학자로는 박제가(朴齊家)와 박지원(朴趾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빈번한 연경(燕京) 방문에서 얻은 견문과 경험에 보태어 예리한 식견으로 『북학의(北學議)』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각기 엮어 내놓았다.

이 밖에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 이규경(李圭景)의 『백운필(白雲筆)』, 서유구(徐有榘)의 『행포지(杏蒲志)』·『종저보(種藷譜)』 그리고 백과전서식의 『임원경제지』, 정약용(丁若鏞)의 논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농업론 등이 실학파학자들의 농정과 농업기술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나타났다.

이들 논저들은 탁월하고 혁신적인 내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농론(農論) 자체로 또는 보급되지 않은 교본(敎本)으로 매몰되고 말았다.

자연재해에 따른 흉작과 악정(惡政)에 시달린 농민들에게 대용식품이 될 외래작물의 도입은 이 시기의 식량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중에서 고구마[甘藷]·감자[馬鈴薯] 및 옥수수가 특기할 만한 것들이다. 고구마는 1763년(영조 39)에 통신사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씨고구마[種藷]를 얻어 부산진으로 보낸 것이 그 도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거의 같은 때에 이광려(李匡呂)와 강계현(姜啓賢)도 씨고구마를 얻어 심어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강필리(姜必履)는 동래(東萊)에서 시험재배하여 민간에 장려하는 한편 『감저보(甘藷譜)』를 지었다.

이들은 씨고구마를 서울로 보내 재배를 꾀하였으나 실패하고, 재배는 한때 영남지역에만 보급되었던 모양이다. 1813년(순조 13)에 이르러 김장순(金長淳)과 선종한(宣宗漢)이 많은 씨고구마를 기호지방에 보급시키기 시작했으며 『감저신보(甘藷新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824년에 당시 호남순찰사였던 서유구가 『종저보』를 편찬하여 호남지방에도 재배를 장려하였다. 고구마의 재배에 알맞은 땅은 기름지고 가볍고 질이 거치른 땅으로 양지쪽을 택하여 여러 차례의 겨울갈이로 벌레알을 죽이고 거름을 한 뒤 곡우 전에 3, 4차 갈아서 둔덕을 만들어 모를 옮겨 꽂고 생육이 진전하여 무성하게 되면 적절히 마디와 덩굴을 막거나 자르고, 가벼운 서리가 한두 번 내린 뒤 수확한다.

『종저보』의 풍부한 내용을 보면 영남·호남·기호 각지에 알맞는 고구마 경종법(耕種法: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법)을 알아내느라 무던히 노력한 자취가 역력하다.

이와 같이 여러 인사들이 고구마의 재배법을 연구하였고 그 보급에 힘썼건만, 그 재배법과 저장법이 까다로워 파급의 속도가 느렸다. 감자는 고구마보다 60년이나 뒤늦어 함경북도를 통하여 도입되었으나 불과 10여년 만에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갔다.

두만강을 건너 도입, 보급한 공로자는 명천김씨(明天金氏)·이향재(李享在)·신종민(申鍾敏)·김사승(金士升) 등이 있다. ‘북저(北藷)’라고도 하는 감자는 ‘남저(南藷)’라고도 불린 고구마와 달라 한랭지에도 잘 견디며, 재배법이 비교적 간단하며 다수확성이다.

이 새로 도입된 작물은 평지는 물론 화전(火田)에 이르기까지 단시일에 보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농가마다 심는 옥수수는 30여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크게 나누어 수끼계·당쉬계·강남(강냉이)계·옥수수계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때 어느 경로를 통하여 들어왔는지 『농가집성』·『색경(穡經)』·『산림경제』 등에도 이 곡물이름의 기록이 없고, 1766년에 나온 『증보산림경제』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옥수수에 5품종이 있으며 비옥한 땅에 자라고 쪄먹고 죽을 쑤어먹기 좋다 하였다.

그런데 1800년대 초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서유구의 『행포지』에는 옥수수 품종이 청·백·홍 3품종이 있으며, 가루로 하여 양식으로 충당할 수 있고 맛이 밀가루에 견줄만하나 국민들이 그리 숭상하지 않는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에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땅콩[落花生]은 1778년경에, 완두콩[豌豆]은 두만강을 건너 들어온 것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농경기술의 발달도 부진하여 농구의 모습은 경작에 맞지 않고 장공기술(匠工技術)도 좋지 않아 질과 능률이 떨어져 중국의 농구를 본떠서 만들거나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파종도 살파(撒播:씨뿌림)와 밀파(密播:씨앗을 빽빽이 배게 뿌림)에 치우쳤고, 거름의 수집·운반·저장에 힘쓰는 것이 부족하였다.

채소류의 재배도 종자의 선택과 거름주는 방법이 시원하지 않아 모처럼 북경에서 들여온 것도 몇 해 지나지 않아 퇴화하기 일쑤였다. 수차제(水車制)는 논의만 많았을 뿐 별로 보급을 못 보았고, 수리시설은 허물어져만 갔다. 목화재배는 활발했으나 누에와 뽕은 쇠퇴하여 양잠은 여인의 소업(所業)으로 축소되고 과목류 재배도 매년 줄어갔다.

이러한 농업의 쇠퇴 속에서도 목화와 인삼재배 등은 그 기술과 경영이 발전했다. 특히, 인삼은 산삼종자를 산곡에 파종하는 산에 옮겨 심어 기르는 삼양법(蔘養法)에서 출발하여 차차 집약적인 삼밭에서 가꾸는 가삼재배(家蔘栽培)가 이루어졌다.

가삼법이 시작된 것은 정조 때이며, 정조 말에서 순조초에 걸친 기간에는 개성에까지 그 재배지가 북진되어 결국 그곳이 명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중국과 일본에의 사신들의 내왕이 잦고 실학자들과 관심있는 인사들의 열성이 가세되어 고구마·감자·옥수수 등의 도입이 단시일에 꽃피게 되었음은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기후와 토질이 판이한 원산지에서 이 땅에 도래, 정착되기까지에 나타난 재배법의 연구와 보급노력은 당시 농업기술발달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조선 말기의 농업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도도히 들어오는 서양문물이 이 땅의 농업기술에도 영향을 끼칠 기운이 떠돌았다. 1884년(고종 21)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과 농상공사(農桑公司)의 설치를 비롯하여 미국의 새로운 농기계류의 도입, 외국농작물 종묘의 주문, 외국 가축의 구입 등 한때 활발한 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1884년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農政新編)』과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蠶桑撮要)』, 1886년 정병하(鄭秉夏)의 『농정촬요(農政撮要)』 등 신농업서적이 출판되기도 하였지만, 이 서적들은 보급의 행운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각계로 퍼져 있던 일본인들의 눈에는 우리나라의 농법이 심히 낙후된 것으로 보였다. 논농사의 대부분이 단작을 하고 있으며 논갈이도 불완전하고 그 횟수도 적었다. 벼의 품종은 강약이 혼합되어 잡다하였다.

수리면을 보더라도 많은 논이 비를 기다려 모를 낼 수 있었고, 하천을 이용하는 관개시설이 부족하였으며 저수지를 이용할 수 있는 수리안전답은 극히 적었으며, 그나마 이전의 제언은 대부분 황폐한 상태였다. 경운·제초·조제·저장 등에 쓰이는 농구의 종류 및 제조가 매우 단순하였다.

수확고는 김해·양산·밀양·은진 등의 극상답 1단보당 현미(玄米)로 계산하여 1.8∼2.2석이었고, 일반 하답(下畓)에서는 7두 정도였으므로 평균하여 1∼1.5석이었다. 전국의 쌀 수확고는 약 1200만 석(또는 900만 석)으로 보았다.

맥류와 두류의 경우 역시 졸렬을 면하지 못하여 비료의 부족, 밭갈이의 불충분, 병충해의 방치 등으로 수확량이 일본의 반에 지나지 않아, 1단보당 소출이 보리 1.5석, 밀 1석, 콩 1∼1.5석이었다.

인삼은 재배법도 정교하고 무엇보다 그 제품인 백삼·홍삼은 국제시장의 경쟁을 물리쳤는데, 재배지로는 개성을 으뜸으로 하여 용인·강계·금산·충주 등이 유명하였다.

목화는 함경도 및 강원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 각지에 재배되어 그 면적이 5만 6000여 정보에 수확량 300만 관 이상을 헤아렸으며, 수출도 거의 1만 관에 이르렀다. 품질도 중국면과 인도면에 비견할 만큼 양호하다고 보았다.

담배는 우리나라의 토양과 기후에 맞고 일반민중의 기호대상이 되어 전국 도처에 경작되어 그 면적이 2만 1600여 정보에 생산이 454만 관에 도달했는데, 성천·곡산·김화·용인 등이 명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채소의 재배는 각지에서 자급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서울 부근과 개성 등지에 번성함을 볼 수 있었다. 과수재배에는 미국인·캐나다인·일본인들의 경영을 보게 되었다.

당시의 축산은 그 대상이 소·말·닭·염소 등이 주품종이었으나 그 가운데 한우(韓牛)는 사역을 목적으로 하는 역축(役畜)으로 우수하여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한때는 농가 5∼10호마다 한 필의 경우(耕牛)를 소유하였고, 일본과 러시아로의 수출도 활발하여 수출 두수가 1만 3000두에 이르렀다. 한우는 거친 먹이도 잘 먹으며 유순하면서도 쟁기갈이, 두엄의 생산, 운반용 그리고 식용에 아주 긴하게 쓰였다.

말은 비록 체구가 작으나 운반용이나 전용(戰用)·공용(貢用) 등으로 이전에 그처럼 목축(牧畜)에 힘썼던 것이 이때에는 목장이라고 일컬을 것이 별로 없게 되었다. 돼지·닭·염소 등은 육용(肉用)이나 난용(卵用)으로 재래종이 농가의 자급 정도로 사육되고 있었다.

양잠업은 우리나라의 토양이 뽕나무재배에 적당하고 기후로는 5, 6월의 건조가 누에치기에 알맞아 예로부터 성행되었던 것이나, 기술적인 진전이 별로 없는 것은 부녀자의 전업으로 맡긴 결과 개량의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의 뽕밭은 751정보, 양잠호수는 6만 8500여 호였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주요 분야는 식량확보를 위한 벼농사와 일본방적공업의 원료획득을 목표로 한 목화재배, 그리고 기업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었던 과수재배의 세 가지였다.

벼재배에 있어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1천여 종이나 되는 많은 벼품종은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을 강력하게 장려함에 따라 재배면적이 점차 줄어들고 쇠퇴하게 되었다.

목화의 작황도 1904년 일본을 통하여 미국육지면 종자를 수입하여 순화(馴化)에 힘쓰는 한편 재래품종에서 양종도 선발하여 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고려 말에 처음 들여온 목화가 임진왜란 전까지 융성기를 이루어놓아 그 뒤로도 현상유지를 계속하더니 조선 말기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본의 강력한 면작계획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과수재배는 우리나라의 풍토에 적합하여 고래로 각종 과일을 생산하여왔고, 각지에 명산지를 두기까지 하였으며, 제주도 및 남해연안의 귤재배는 크게 장려되기도 하였다.

서울 근교를 제외하고는 과수원다운 것이 거의 없었을 즈음인 1890년경에 길주·원산·대구 등지에 외국인이 서양사과·복숭아·서양배 등을 시험재배하여 본 이후 점차로 과수원규모의 재배가 활발히 시작되었다.

1905년경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기업가들이 황주, 진남포, 경인지방, 경상북도지방, 특히 대구 주변, 구포·나주 등지에 각종 서양사과(祝·紅魁·紅玉·滿紅 등)와 배(金村秋·明月·長十郎 등)를 대규모로 심게 되었고, 그 뒤 이 지방들은 사과 또는 배의 명산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인들은 각종 작물의 품종도입과 아울러 경작법 이식에 부수하여 우선 일본제 농구의 판로를 얻게 되었다. 농기구의 수입 외에 일본인 공장(工匠)의 내왕이 잦아졌고 농구를 제작하여 공급하였다.

1908년에는 일본제 농구를 개량농구라 하여 일부 농민에게 무상배부한 것을 비롯하여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식괭이[備中鍬·三德鍬]·일본낫[松原鎌]·쇼벨·도급기(稻扱器)·당기(唐箕)·연직기(筵織機)·관수차(灌水車) 등이 그 선구였다.

비료면에서도 통감정치 이래 우선 자급비료로서 퇴비증산, 녹비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판매비료의 도입도 시작되었다. 재배면에서는 해이하여졌거나 근대과학의 조명을 받지 못한 종래의 여러 농법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즉, 선종(選種)·종자처리·파종·이앙·시비·중경·제초·병충해대책·수확·조제·포장 등이 그들의 영향을 입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농업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함에 따라 강력한 일본자본을 배경으로 일본농업(정책·경영·기술)의 이식이 벼농사·목화재배·과수재배, 담배와 인삼의 경작 등에 수행되어갔다.

특히 일본은 자국내의 식량난 타개를 위하여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우리나라에서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즉, 경종법개선·품종개량·종자갱신·퇴비장려·수리개량·개간·간척 등 다각적인 시책으로 증산의 실효를 거두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우리나라 쌀의 일본으로의 수출증가가 일본의 열등미 가격의 폭락을 일으켜 이른바 선미배척운동(鮮米排斥運動)이 격화되었고 1930년대의 세계적인 농업공황이 겹치기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 수리조합비의 과중한 부담 등으로 농가의 토지방매가 성행하여 2차 산미증식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우리나라 농업의 변모를 가장두드러진 측면인 벼농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벼농사 면적은 1910년에 132만 정보이던 것이 1941년에는 164만 정보에 달하였고, 몽리면적은 수만 정보에서 23만 8000정보에 이르렀다.

미곡의 수확량은 1910년에 1240만 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2488만 석으로 상승되어 1910년에 반당 0.77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1.5석으로 배의 수확량을 올리게 된 셈이다. 그 동안에 일본품종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와 1935년경에는 75%까지 재배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35년경부터는 개량품종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1945년을 전후하여 일본재래종을 교체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되었다. 미곡의 반당수량이 약 30년 동안에 배증하게 된 기술진보의 배경에는 품종생산력의 발전, 수리시설의 증강, 금비(金肥) 사용량의 증가, 그리고 기타 경종법 개선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보겠으나, 농기구면의 기계화는 별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어떠하든지 이렇게 증산된 미곡의 많은 부분이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1938년에는 수출량이 1070만 석에 달하였다. 한편으로 잡곡생산은 1910년대에 약 2천만 석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2400만 석 내외로 약간 증가되었을 뿐, 수출미의 대신으로 1930년대에는 부득이 280만 석을 수입하게 되었는데 1910년대의 26만 석 수입의 10배 이상이나 된다.

이것을 보면 맥류를 위시한 잡곡류의 증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투자성이 높은 타작물, 특히 과수·연초 등에 있어서는 많은 품종개량과 재배법 개선이 이루어졌다.

광복 후 농업

광복 후의 혼란은 농업생산을 극히 위축시키기에 이르렀다. 미군정하에서는 3·7제 실시로 토지제도 개선에 일보를 디디었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성안되었던 「농지개혁법」이 다음해에 공포와 시행을 보았다. 한편으로 양곡통제 양곡수납제의 실시를 본 바도 있었다.

1949년에는 농업증산 3개년계획(1949∼1951)과 축산9개년계획 및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 등 의욕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의 미곡생산상태를 보면, 1945∼1950년의 경작면적이 약 100만∼110만 정보였고, 반당수량은 1.2∼1.3석이었으며, 1951년에는 동란의 영향으로 경작면적이 92만 정보, 반당수량은 1.2석으로 감퇴하였다. 1952년에는 난중에 흉작이 덮쳤다.

휴전을 전후하여 농업정책은 증산에 집중되어 토지개량사업의 추진, 종자갱신사업의 실시, 미맥증산 5개년계획(1953∼1957)의 실시 등 전재복구와 아울러 식량수급균형을 실현시키려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53년도 하반기부터는 그 해의 미곡풍작과 아울러 산업생산이 소강상태로 되돌아가고 각종 외국원조가 활발히 주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업증산 5개년계획은 여건의 미비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58년에 다시 식량증산 5개년계획을 수립, 농토개발에 의한 최대한의 경지면적확보를 기도하고 관개개선사업·농업교도사업·종자개선사업 등을 적극 실시함과 아울러 자급비료의 시설을 늘리는 등으로 단위면적당수확량의 증대를 꾀하려 하였다. 그 결과 1959년도에는 곡류생산이 2700만 석(97.6% 실적)이었고, 1960년도에도 비슷한 수확량을 올렸다.

1955년 이후에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연평균 30만∼40만 톤(국내미곡생산량의 약 10%)을 들여왔다. 1950년대의 농업기술계와 농학계의 움직임을 보면, 농사원(農事院) 기구하에 중앙과 각 도의 농사시험장·원예시험장 등 연구소의 활동과 10여 개 농과대학의 운영을 볼 수 있었고, 연구발표도 점차 활발하여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술 겸 기술에 관한 잡지도 발간되고 농업기술에 관한 단행본도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실지면에 있어 비료의 시용량도 급증하여 충주와 나주의 비료공장 설치를 서두르게 하였으며, 농약의 수입이 활발히 추진되어 수많은 새로운 농약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예면에서의 육종 및 종묘사업은 눈부신 발전을 보아 국내 채소의 자족자급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과수재배도 활발하였다.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가운데 농업정책의 기본목표는 농업의 근대화와 농가소득의 향상 및 식량증산을 통한 자급자족체제의 확립에 두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시책이 나왔고, 또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법령이 제정되었다. 한편으로 농사원이 농촌진흥청으로 개편되어 농사시험연구지도보급과 생활개선 및 기술훈련 등을 관장하게 되었다.

농지정책에 있어서는 경지정리와 농지확장 및 수리사업(특히 전천후농업용수개발)으로 농업증산과 영농기계화의 기반조성에 힘썼으며, 생산정책에서는 비료·농약·농기구 등의 자재를 적기에 염가로 공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비료는 자급달성을 위하여 비료공장 증설에 주력하고 3요소 균형시비와 토양산성화 방지에도 힘썼다. 이와 같은 중농 또는 농공병진의 정책하에서 1960년대의 학계와 기술계는 농업면에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이 때의 농학관계학계는 20여 개로 늘어났고 1967년에는 이를 종합하는 한국농림수산협회(현재의 농업과학협회)의 창설이 있었다.

농촌진흥청 산하의 각 연구소·시험장의 연구는 지도사업과 함께 더욱 활발해졌고, 1966년 원자력청 산하의 방사성농학연구소의 신설도 보았다. 각 농과대학의 연구실과 그 부설연구소의 학적 활동도 점차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많은 농학관계 업적 중 특기할 것은 우선 초기에 노후화답 및 추락현상 그리고 낮은 생산지 개략조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여 성과가 좋았으며, 벼품종개량을 위한 육종연구가 강력히 추진되었고,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농업연구도 볼만하였다.

국내에서 육성된 벼품종으로 이때 보급된 것이 재건·진흥·신풍·호광·수원62호·풍광 등이었으며, 유명해진 통일계 품종의 시조인 통일벼(IR667)의 육성은 1960년대 후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국제연합특별기금,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및 정부의 공동으로 뒷받침된 농촌진흥청의 토양조사사업은 1964년에 시작하여 5년간에 걸쳐 그 1차 작업을 끝내었는데 대형 9권의 『한국개략토양도(韓國槪略土壤圖)』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장기계획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현재 30여권의 정밀토양도가 간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토양비옥도조사사업도 이루어졌다.

실지 농사기술과 연결된 연구로는 조기육묘, 벼재배시기의 이동, 조만식재법, 건답직파, 재식밀도, 규소비료시용, 엽면시비 등 활발한 시험과 기술보급이 있었다. 식물보호면에서도 방제·예찰의 연구와 공동방제체제와 기계화에 대한 촉구가 컸고, 또 한해대책으로 지하수개발이 강력히 추진되어 현재의 영구한해대책 확립에 큰 기틀을 만들었다.

경제작물재배의 주산단지조성이 강조되었고, 잠업 분야에서도 상목육성과 잡종강세를 이용한 우수잠품종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도 농정의 기본목표를 식량증산과 농가소득향상에 두어 여러 가지 제도적 조처로서의 법이 마련되고, 농림수산물의 저장처리 및 가공방법을 개발함으로써 농어민의 소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농어촌개발공사(農漁村開發公社)의 창립을 보았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72년부터 농정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즉, 중화학공업의 건설, 수출의 획기적 증대와 함께 농어촌의 혁신적 개발을 목표로 하여 농촌의 중점개발을 위한 각종 시책이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히 추진되었다.

지붕개량·농촌전화·농용수개발·생산기반확충·협동생산·새마을공장건설 등과 아울러 주곡증산에 새로운 중점이 주어지게 되었고, 특히 세계식량파동을 계기로 식량자급을 위한 인식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다수확품종의 보급이 확대됨에 따라 증산기술이 더욱 향상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할 비료·농약·농기계 등 영농자재와 자금지원도 집중투입되었다.

1975년에는 농업진흥공사 산하에 농지확대기술개발단이 발족되었다. 그리고 농업생산기반 조성사업으로 주목되는 것은 4대강유역 종합개발의 착수와 진행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발전용은 물론 하천개수, 관개개선, 조림·사방, 농업용수·공업용수·식료수의 공급, 홍수조절, 간척 등 다목적사업을 종합적으로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담양·장성·광주·나주의 4개 댐은 1976년에 완공을 보았다.

1960년 초기에 신설된 충주비료공장·호남비료공장에 이어 삼척의 석회규소공장(1964), 장항의 용성인비공장(1966)의 설립을 보았으며, 계속하여 제3비료공장(영남)·제4비료공장(진해)·제5비료공장(한비) 등 대단위공장도 준공되었다.

1977년에는 제7비료공장(여수)이 준공되어 이로써 국내 비료의 생산능력은 300만 톤에 이르러 완전자급과 아울러 연간 50만 톤의 수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단위면적당 시비량의 추이를 보면, 1967년에 1㏊당 209㎏의 소비량을 보이던 것이 1972년에는 약 40%의 증가를 보였고, 1973년에는 1972년에 비하여 23%나 증가된 355㎏의 소비량을 나타냈다. 1970년 이후로는 3요소 균형시비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복합비료 증산책이 추진되었다.

한편 농약의 소비량도 1965년의 2,990톤에서 1975년의 2만 559톤으로 약 7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으나, 자급률은 27.5%(1975년 현재)에 머무르고 있다.

농업기계화를 위한 계획(1972∼1976)에서 동력경운기 10만 대 보유를 목표로 하였고, 양수기·동력분무기·동력탈곡기·트랙터 등 국산기계를 다량 공급하고 있다.

1㏊당 총동력투입량을 보면 0.5HP/㏊(1975)로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과의 차이를 구분하는 경계인 최소동력범위에 들어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농업용수개발에 의한 수리안전율은 1967년의 57.6%에서 1976년에는 86%로 상승하였고, 경지정리는 1967년의 13.8%에서 1976년에는 45%로 진척되었다.

주곡증산정책과 관련해 그 동안 이루어진 가장 획기적인 농업기술의 발달은 다수확재배의 연구와 그 결과의 보급에서 볼 수 있다.

특히, 통일계의 수도품종의 개발육성과 신속한 보급,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재배기술과 비배관리에 의한 성과가 평가된다. 쌀생산량은 1966년의 392만 톤에서 1976년의 521만 톤(3621만 석)으로 대폭 증가했고, 반당수확량은 상기 연도에서 각각 287㎏과 429㎏으로 늘어났다.

반당수량에 있어서 품종별로는 일반미 396㎏, 통일계미 479㎏(1976)이었다. 1977년에는 심한 가뭄이 극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쌀생산량이 전년보다 상회하였다.

이른바 통일벼(IR667)는 1970∼1971년의 시험결과 다수성(多收性)이 인정되어 1972년에는 30만㏊에 보급되었으며, 그 이래 조생통일·유신·밀양·수원·이리의 각종 통일계 품종이 계속 육성되어 최초의 통일벼를 대신하여 적지에 맞추어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품종들은 적지성·다수성뿐만 아니라 내도복성(耐倒伏性)·내충성(耐蟲性)·내병성·내냉성 그리고 미질(米質)까지 고려하여 육성되고 있다.

녹색혁명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미곡의 경이적인 증산은 통일계 품종의 육성과 아울러 이를 뒷받침하는 보온못자리의 개발과 보급, 집단재배, 병충해의 공동방제, 수리개선, 다비(多肥: 거름이 많음) 등과 같은 재배기술상의 진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른바 재래종의 반당수량이 1972년에 321㎏이던 것이 1976년에는 396㎏으로 증가된 것에서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밭작물에서도 보리의 신품종육성과 답후작기술의 진보로 1976년에는 1341만 석이나 생산되었으나, 1976년 말과 1977년 2월 사이에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 미작이 반감되는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맥류 중 밀은 막대한 양(1975년 180만 톤)이 수입되었다.

1977년에는 맥류연구소가 준공되어 맥류의 품종개발·재배법개선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맥류증산의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수의 재배도 1960년대에 와서 본격적인 연구와 시험이 시작되어 사과·배·포도·복숭아·감·귤 등의 신품종도입과 시험·보급이 활발하였는데, 특히 온주밀감의 재배보급과 왜성사과의 재배는 주목할만하다.

채소원예에서는 작물의 계절성을 극복하여 일년내내 생산할 수 있는 주년생산방법을 확립, 도시 근교의 놀라운 원예수준을 이룩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쌀의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해 1984년도의 수확량은 3950만 석에 이르렀다. 여기에 보리의 수확량 280만 석을 보탠다면 주곡생산량은 4230만 석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율도 커서 1984년 현재 4천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인구와 주곡생산량을 비교해보면 쌀·보리의 자급은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 밀·옥수수·콩 등의 외곡도입이 늘어나 전체식량자급도로서는 50%(1984)를 밑돌고 있는 상태이다.

즉, 이들 외곡의 대부분이 가축을 위한 사료로 소비되므로 이들을 직접식량에서 제외하고 식량자급도를 계산한다면 73%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곡물소비추세의 변화는 식생활의 다양화, 특히 서구화 경향이 가미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즉, 빵식의 보급과 과자류 소비증가, 그리고 육식 및 동물성 식품 소비의 대폭증대를 보게 된 것이다.

육류(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 등)의 소비와 우유 및 유제품 소비의 증가는 축산 발전과 연결된다. 육류와 동물성 식품의 소비증가에 비해 쌀과 보리의 소비는 해마다 줄어들어 쌀은 14년 동안(1971∼1984)에 6.8%, 보리는 80%의 소비감소를 보았다. 즉, 1975년까지 1100만∼1200만 석에 이르던 보리생산이 점차 줄어들어 1985년에는 280만 석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주곡소비양상의 변화와 아울러 채소와 과일의 소비는 1970년에 비하여 약 2배로 증가함으로써 크게 변하였다. 벼재배의 경우 사상 최초의 우수품종이었던 통일계가 1978년을 고비로 병충해에 약해졌다는 것이 증명되어 1979년 이후로는 벼병충해방제에 초점을 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작물품종의 육종재배기술의 개발과 아울러 농업기계화(1978년에 농업기계화촉진법 공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경운기·트랙터·이앙기·바인더·콤바인 등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있다.

경지정리율은 1985년 현재 63%로 개선되었다. 그리고 유전공학적인 면으로 농학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포융합법, 조직배양을 통한 육종연구를 비롯하여 장차 유전자조작재조성에 의한 육종이 시도되고 있어 앞으로 그 성과가 기대된다.

1990년대의 쌀의 생산동향을 보면 우선 생산량에 있어 1993년과 1995년을 제외하고는 1997년을 포함하여 대풍년을 계속 맞았다.

1996년도의 수확량은 총 3,696만 섬으로 반당 507㎏에 이르렀다. 벼재배품종도 통일계의 쇠퇴기(1980년대)를 지나 고미질(高米質) 품종 및 다양화 품종의 시대가 되어 여러 가지 쓸모(가공용·식미·기호 등)에 알맞은 품종들이 육성 또는 도입되었다.

몇가지 보기를 들면 오대·상주·진미·화성·장안·동진·만금·영남·아끼바레(秋晴) 등인데 향미(香米)와 유색미(有色米) 같은 특수품종들도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과 1995년 국제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국제경쟁력이 취약하였던 우리 농업, 특히 쌀생산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즉, 쌀시장개방압력이 드세져 벼재배면적의 감소가 해마다 눈에 띠고 있다.

1996년 현재의 식량작업도를 살펴보면 쌀 92.3%, 보리 59.0%, 밀 0.67%. 두류 9.7%로 총식량작업도는 25.6%로 1980년대의 반에 불과하다. 즉, 쌀만은 자급에 가까울 만큼 생산하고 있는데 이것마저 시장개방으로 위축될 염려가 생기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한국농업의 과제를 생각할 때 우선 고품질 다수확성 품종육성를 위해 작물·가축의 재배·사양기술을 첨단기법으로 향상시키고 생산기반(경지정리·배수개선·농업용수 등)의 정비에 힘을 쓸 것이며, 지대(地代)와 노임의 고가를 고려해 농촌마을의 경영체가 운영될 필요가 있다.

또 농촌소득원을 증가시키기 위해 농외소득을 늘리고 생산비 절감을 위한 기계화와 시설을 더욱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유통구조개선은 농산물개방에 따라 외국 농산물의 대량유입에 대항하는데도 큰 몫을 할 것이다.

새 시대에 있어 농업정보망의 충실화 그리고 영농후계자 양성과 농촌복지(자녀교육, 의료, 노후생계 등)가 농촌공동화(農村空洞化)를 방지한데 더욱 필요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농가월령(農家月令)』(고상안)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서유구)
『산림경제(山林經濟)』(홍만선)
『한국농학사』(이춘녕, 민음사, 1990)
『한국농기구고』(김광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6)
『농림수산고문헌비요』(김영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2)
「우리나라 수도작기술의 변천」(이은웅 외, 『학술원논문집』35집, 1996)
「21세기산업사회에 있어서의 농업의 역할」(이춘녕, 『학술원논문집』35집, 1996)
「한국고대의 농업기술과 생산력」(이춘녕, 『국사관논총』31집,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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