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帖)은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최근 김정호의 지도 중 이름이 같으면서 내용이 다른 지도첩이 새롭게 조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필사본의『동여(東輿)』 14첩은 1층에 큰 글씨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라고 쓰여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는 필사본의『대동여지도』 18첩이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앞으로는『대동여지도』라는 이름 앞에 ‘목판본 22첩’, ‘필사본 14첩’, ‘필사본 18첩’이란 수식어를 붙여 구분해 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1861년에 간행된 것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의 2본이 각기 1985년 보물로, 2002년 보물로, 1864년에 간행된 것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1본이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판목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1매, 국립중앙박물관에 11매가 남아 있어 일제강점기 이후 이야기되었던 판목소각설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목판본『대동여지도』 22첩은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이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
현재 20본 안팎이 전해지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미국의 밀워키대학교 도서관 등 외국에서도 속속 발굴되고 있어 향후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김정호는 1834년(순조 34) 그의 첫 번째 역작인『청구도』2책을 제작한 이후 1840년대까지 이용의 편리에 초점을 맞춰 3번에 걸쳐서 개정판『청구도』를 지속적으로 제작하였다.『청구도』에 수록된 기본 정보는 1770년(영조 46)에 신경준이 약 4.1㎝의 20리 눈금선[方眼] 체계를 기초로 제작한 고을지도책을 1776년(정조 원년)에서 1787년(정조 11)년 사이에 이용의 편리를 위해 재편집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해동여지도』3책 계통과 동일하다.
1850년대에는 분량이 적어 휴대와 이동에 편리한『청구도』의 책 형식을 버리고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 병풍식(또는 절첩식)의 첩 형식을 채택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4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8첩, 필사본의『동여도』23첩을 순서대로 제작한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대동여지도』18첩부터 산줄기, 물줄기, 해안선, 지명의 위치 등 기본 정보의 대대적인 교정이 나타나며, 필사본의『동여도』23첩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와 같은 교정은 기존의 거의 모든 지도와 지리지에 수록된 정보를 장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비교·검토하여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김정호 스스로도 자신의 지도를 전체적인 흐름에서 이해해야지 100%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용하면 안 된다는 문구를 남겨 이용자들에게 지도의 한계를 미리 알려주었다.
실제로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틀렸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틀린 부분을 찾기가 어렵지 않으며,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한 서울 부근에서도 틀린 부분이 발견된다. 1861년에 제작된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의 기본 정보는 필사본의『동여도』23첩과 동일하면서 지명의 수가 1만 8000여 개에서 1만 1000여 개로 줄어들고 산줄기와 기호의 표시 방법이 달라지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동여도』는『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된 선행지도였다고 생각된다.
먼저, 휴대와 이동보다는 동서와 남북의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①이어보기에 편리하도록 지도 각 면의 외곽 부분에 여백을 없앴다. 이 때문에『청구도』의 외곽 여백에 표시된 10리 간격의 축척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1층의 가장 앞쪽에 가로와 세로 각각 80리와 120리의 눈금선표를 수록하여 축척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였다.
②『청구도』는 전국을 29층 22판으로 나눈 최고 수준의 찾아보기지도[索引圖]를 가장 앞쪽에 배치하고 지도의 각 면 외곽에 층판의 번호를 적어놓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이어보기에 초점을 맞춘『대동여지도』는 지도 각 면의 외곽에 층판의 번호를 적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각 첩의 표지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써주는 방식을 채택하여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많이 찍어내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났다. ①판각의 어려운 때문에 채색필사본인『동여도』의 1만 8000여 개의 지명보다 7,000여 개가 적은 1만 1000여 개의 지명만 수록하였다. ②흑백으로만 찍어내야 했기 때문에 현대 지도의 범례(凡例)에 해당되는 지도표(地圖標)의 기호가『동여도』의 26개에서 22개로 줄어들었다. ③물줄기·산줄기·해안선이 판각에 쉽도록 단순화 하였으며, 채색필사본의『동여도』가 산줄기를 화려하게 그린 반면, 무덤의 명당 지도인 산도(山圖)에서 물이 흐르듯 이어서 그리는 산줄기의 표현을 도입하였다.
마지막으로, 그 밖의 특징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①『청구도』가 지도와 지지(地誌)의 결합을 추구한 반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철저하게 지도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되었다. 김정호는 전국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이것에 걸맞게 지도와 지리지를 동시에 제작해 왔다. 따라서 철저하게 지도적 속성이 강한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함께 이용할 수 있는『대동지지(大東地志)』15책의 편찬을 전제로 제작되었다.
②『청구도』에서는 한양으로부터 전국 모든 고을까지 실제로 가는 거리를 고을 중심지 부근에 적어주었던 반면에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에서는 도로 위에 10리마다 짧은 사선을 그어 지도 평면 위의 거리가 아니라 실제로 가는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짧은 거리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에서 사용한 방법이 유리하고 먼 거리를 알고자 할 경우에는『청구도』에서 사용한 방법이 유리하였다.
지도의 제작이란 측면에서 김정호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지도책의 제작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희망은 지도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용과 교정 및 필사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한『청구도』에서부터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한 번에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대동여지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었다. 김정호에게 지도의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항시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였다.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호의 지도에는 현재의 10만 : 1 도로지도 등 많이 이용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 근·현대의 대중적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담겨 있다. 이용의 문제만을 고려한다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22첩은 지도사적 가치로 보아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