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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 관련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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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조선후기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신종 관련 제단.
내용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신이 절치부심하면서 대명절의(大明節義)를 부르짖던 무렵 청나라에 불복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지은 단이다.

1704년(숙종 30)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발의로 옛 내빙고(內氷庫) 터에 지었다. 9월 25일 공사를 시작해 12월 24일 준공될 때까지 많은 물자와 인력이 소비, 동원되었다. 공사의 감독은 당시 선공감 감역으로 있던 김시택(金時澤)이 맡았고, 공사의 지원은 호조를 비롯해 6조의 당상이 돌아가면서 하였다.

공사에는 민간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주로 5영의 군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규모는 건물이 없는 제단으로 교사(郊祀)를 지내던 남교(南郊)의 규모를 따라 밖에 담[壝]을 세우지 않고 제단의 담을 쌓았다.

전체 크기는 정방형으로 한쪽의 길이가 150척(45m)이고, 정방형의 모양의 단의 한쪽의 길이가 25척(7.5m)이며 높이는 5척(1.5m)으로 바닥에서 단까지는 네 개의 계단을 두었다. 명칭의 결정은 그 해 11월 24일예문관에서 정해 올렸다. 제사는 연 1회 2월 상순에 택일해 지냈다.

2월로 정한 까닭은 매년 2월이 중국의 왕이 정기적으로 동순(東巡)하는 시기이므로 그 시기를 이용한 것이다. 제사 때는 팔일(八佾 : 나라의 큰 제사 때 추는 규모가 큰 춤)의 악을 사용하고, 악장(樂章)은 문묘(文廟)의 악장을 쓰도록 하였다. 위판은 대명신종의 명칭을 사용, 대명의 국호를 밝히게 하였다.

제례는 임금이 친제함을 원칙으로 했지만. 부득이한 경우 중신을 보내어 대제하게 했으며, 희생은 황우(黃牛)를 쓰고 제물과 기구는 문묘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1884년 갑신정변 이후부터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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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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