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 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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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1권 1~36) 4
삼국유사(1권 1~36) 4
구비문학
작품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왕에 관한 건국신화.
이칭
이칭
주몽신화
목차
정의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왕에 관한 건국신화.
내용

주인공인 동명왕의 이름을 따서 ‘주몽신화(朱蒙神話)’라고도 한다.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밖에 『삼국유사』·『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문」의 서두, 『동국여지승람』의 평양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등에 수록되어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은 오언고시로서 ‘영웅서사시’라고 일컬어질 만한 특성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장편이어서 이 방면의 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우수하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하늘의 신인 해모수(解慕漱)를 아버지로, 강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어머니로 하여 알로 태어난다. 그 어머니가 몸을 의지하고 있던 부여왕조의 금와왕은 그 큰 알을 버리게 하였지만, 짐승과 새들이 알을 보호하였다.

왕이 직접 그것을 깨뜨리려 하였으나 깨지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가 그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알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는 매우 출중하고, 특히 활을 잘 쏘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이라고 불렀다. 금와왕의 일곱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는 계략을 써서 주몽이 기르고 있던 왕실의 말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게 하고, 주몽에게 몸을 피하여 큰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주몽이 도망하여 엄수(淹水 : 혹은 개사수)에 도달하였으나 왕자들의 추격이 급박하였다.

주몽은 물을 향해서 “내가 천제(天帝)의 아들이고 강의 신의 손주(외손)인데 이제 이 추격을 어찌하리오.” 하고 말하자 고기 떼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추격을 면하게 되었다.

주몽은 남쪽으로 달아나서 졸본(卒本)에 도착하여 작은 집을 엮어 나라의 기틀로 삼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비류국(沸流國) 바로 이웃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비류국의 송양왕과 주종 관계를 결정짓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주몽은 활쏘기에 이기고, 계략을 써서 북과 나팔을 빼앗고 마침내 주술로 비류땅이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송양왕의 항복을 얻게 되고 그 뒤 그의 왕국은 더욱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동명왕신화」는, 동명왕의 부신(父神)과 그의 아들 유리(類利)에 관해서는 생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그리고 「동명왕편」의 기록을 절충한 것이다.

『삼국유사』 북부여조에서는 북부여의 천제를 해모수라 하고 그 아들을 해부루(解扶婁)라고 한 뒤, 해부루가 상제(上帝)의 명을 따라 동부여로 옮겨가고 동명이 북부여를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북부여조의 바로 다음에 실린 동부여조에서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재상인 가관불의 꿈에 천제가 현몽해서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해 가라.” 하니 이는 장차 동명왕이 일어날 징조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해모수와 해부루로 이어지는 혈통과 동명왕의 혈통은 별개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해모수가 천제로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천제의 이름으로 해부루를 내쫓고자 하였다면 두 천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유사』는 동부여조의 바로 다음 조항인 고구려에서 해모수를 동명왕의 부신 자리에 앉히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삼국유사』는 “단군기(檀君記)에 가로되, 단군은 서하 하백의 딸을 아내로 맞아 한 아이를 낳으니 그 이름이 부루이다.

이제 해모수가 하백의 딸을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는 기록을 생각하건대, 해부루와 주몽은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말로 해서 오히려 엇갈림이 더해지고 있다. 배다른 형제가 씨가 다른 형제로 바뀐다고 해도 서하백과 하백이 동일한 존재임을 확인하지 않고는 논리가 합당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유화, 곧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숨지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태후 신묘(神廟)를 세우매, 동명왕이 동부여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유화가 금와의 태후라면 해부루의 비(妃)가 되는 셈이고 그렇다면 해부루와 동명이 씨가 다른 형제일 수도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화가 금와왕에 의해서 태후의 대접을 받았다면 이것은 중요한 시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고구려왕조에 있어서도 유화는 동명왕의 태후이기 때문이다.

유화는 동부여와 고구려왕조 양쪽에 걸쳐 태후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추정이 여기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동명왕신화」의 바닥에는 부계가 다르고 모계가 같은 존재들 사이의 갈등이 깔려 있는 셈이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 간의 갈등 내지 혈통 내의 갈등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갈등은 가장 극적인 부분을 구성하는 서사적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가계 내의 갈등이 부여왕조에서 고구려왕조를 파생시켰다면, 같은 형제에게서 백제왕조가 형성된 사례에서 그 파생의 대응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명왕신화」는 추정될 수 있는 이 같은 갈등으로 인하여 상고대 신화들 가운데서 가장 파란많은 신화로 남아 있다. 탄생에서부터 이미 장애와 난관을 겪은 한 인물이 박해를 이기는 과정, 투쟁을 승리로 마무리를 짓는 과정 끝에 한 왕조를 창건하는 줄거리로 이루어져있다. 때문에 「동명왕신화」는 ‘영웅서사시’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동명왕은 기마술과 궁술에 능한 무장다운 면모와 함께 이른바 ‘주술적 탈주’를 감행하고, 또 방술을 부려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적 면모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주술사적 무장이자 왕인 동명왕에게서 상고대 왕권의 편모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속대관』6: 구비전승·기타(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한국의 신화』(김열규, 일조각, 1980)
『한국인의 신화』(한상수, 문음사, 1980)
『한국설화문학연구』(장덕순, 서울대학교출판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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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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