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권당 ()

고려시대사
제도
1314년(충숙왕 1),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北京)에 세운 서재(書齋).
이칭
이칭
제미기덕통소개(濟美基德痛掃漑)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314년(충숙왕 1)
공포 시기
1314년(충숙왕 1)
시행 시기
고려 후기
폐지 시기
1320년(충숙왕 7)
시행처
원나라 연경
내용 요약

만권당은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北京)에 세운 서재(書齋)이다. 이곳에서 남송(南宋) 출신의 유학자인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고려의 명유 이제현(李齊賢)이 서로 교유(交遊)하였고, 그 결과 만권당을 중심으로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정의
1314년(충숙왕 1), 충선왕이 원나라의 연경(燕京, 현 北京)에 세운 서재(書齋).
제정 목적

1307년(충렬왕 33)에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서 무종(武宗)을 주9한 공으로 다음해에 주10하였다. 1313년(충선왕 5)에 충선왕은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해인 1314년(충숙왕 1)에 원나라의 연경(燕京: 주11으로 가서 자신의 주1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웠다. 만권당은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仁宗)이 황태자(皇太子)였던 시절에 주12로 있으면서, 원의 지식인들과 인적 교류했던 당시 인종의 궁사부(宮師府)라는 조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일설에는 만권당의 주2인 제미기덕통소개(濟美基德痛掃漑)가 몽골어와 티베트어를 주3한 어휘로서, ‘jimy-ig-tei’(입을 다물다), ‘tun’(명상하다), ‘suu-gai’(앉아 있다)는 고려식의 불교 주13을 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내용

충선왕은 원나라 인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태자태사가 되었는데, 이 직책은 궁사부 소속으로 원의 인종이 만든 것이었다. 그는 그때 원나라의 관리와 인적 교류를 하였으며, 당시의 경험으로 만권당을 만들었다. 이 서재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곳에서 학문과 여러 사안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갔던 점은 분명하며 그는 이곳에 많은 도서와 그림 등을 모아 놓았다. 주8 출신의 유학자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당대의 주4인 요수(姚燧) · 염복(閻復) · 주14 · 장양호(張養浩) · 원명선(元明善) · 주15 · 소구(蕭㪺) · 홍혁(洪革) 등이 이 곳에 초대되어 주16를 수련하였고, 고려의 학자로는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의 주5으로서 이들과 교유(交遊)하였다.

변천사항

1320년(충숙왕 7)에 원의 인종이 서거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충선왕의 지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주7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만권당도 이때 자연히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 및 평가

만권당은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설치한 것으로,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남송 출신의 유학자이자 당대의 명유였던 사람들과 교유한 장소이다. 당시 이곳을 중심으로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그곳에 모였던 남송의 학자들은 당시 남송에서 완성된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과 시(詩) · 서(書) · 화(畫)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통해 이후 고려에 주자성리학이 보급되었고 조맹부의 주6와 같은 새로운 주17의 기풍이 수입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익재집(益齋集)』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논문

김도영, 「만권당과 제미기덕당에 대한 재검토」(『역사학보』 210, 역사학회, 2010)
김상기, 「이익재의 재원 생애에 대하여: 충선왕의 시종의 신으로서」(『대동문화연구』 1,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64)
김인호, 「고려후기 이제현의 중국 문인과의 교류와 만권당」(『역사와 실학』 61, 역사실학회, 2016)
류중옥, 「만권당, 제미기덕당고변」(『전북사학』 32, 전북사학회, 2008)
이개석, 「『고려사』 원종·충렬왕·충선왕 세가 중 원조관계기사의 주석연구」(『동양사학연구』 88, 동양사학회, 2004)
이형우, 「만권당에 대한 일고찰」(『원대 성리학』, 포은사상연구원, 1993)
장동익, 「신자료를 통해 본 충선왕의 재원활동」(『역사교육논집』 23·24, 역사교육학회, 1999)
정옥자, 「여말 주자성리학의 도입에 대한 시고」(『진단학보』 51, 진단학회, 1981)
주채혁, 「원 만권당의 설치와 고려 유자」(『손보기박사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
주석
주1

개인 소유의 집. 우리말샘

주2

달리 부르는 명칭. 우리말샘

주3

어떤 언어의 소리를 그 언어에서 사용하지 않는 다른 문자로 표기하는 일. 우리말샘

주4

이름난 선비. 또는 유명한 유학자. 우리말샘

주5

임금의 곁에서 문학으로 보필하던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6

원나라 초기의 조맹부의 서체. 우리말샘

주7

중국 당나라ㆍ송나라 때에, ‘티베트족’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8

중국의 송나라가 1127년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가 임안(臨安)으로 천도한 때부터 1279년 원나라에 망할 때까지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9

임금으로 받들어 모심. 우리말샘

주10

폐위되었던 제왕이나 후비(后妃)가 다시 그 자리에 오름. 우리말샘

주11

중국 베이징(北京)의 옛 이름. 옛날 연나라의 도읍이었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우리말샘

주12

고려 시대에, 동궁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종일품 벼슬. 우리말샘

주13

참선하는 방. 우리말샘

주14

중국 원나라의 화가ㆍ서예가ㆍ문인(1254~1322). 자는 자앙(子昂). 호는 집현(集賢)ㆍ송설도인(松雪道人). 서화와 시문에 뛰어나서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에 ≪상서주(尙書注)≫, ≪송설재집(松雪齋集)≫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5

중국 원나라의 학자(1272~1348). 자는 백생(伯生). 호는 도원(道園)ㆍ소암(邵庵). 인종과 문종을 섬기고, ≪경세대전≫ㆍ≪조종실록(祖宗實錄)≫ 등 많은 대전(大典)의 편집을 주재하였다. 저서에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이 있다. 우리말샘

주16

학문과 예능을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7

글씨와 그림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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