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순약(舜若)으로 민철호(閔哲鎬)의 아들이며,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문과에 급제했다. 1881년 대교(待敎)에 임용되어 가주서, 설서, 한림 부교리, 부응교, 학령, 집의, 장악정, 남학교수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이조참의, 조사오위장 겸 보덕, 대사성, 돈녕도정 병조참지, 검교보덕, 춘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1886년 종2품으로 승진하여 이조참판, 예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동경연, 동의금, 동춘추, 동돈녕 우윤, 빙고제조, 공조참판, 호조참판, 경연특진관, 의정부 당상, 상의원 제조, 사옹원제조, 직제학, 지경연 등을 지냈다.
1889년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 광주유수, 내무협판, 이조판서, 지춘추, 전의제조, 지돈녕, 지의금, 예조판서, 우참찬, 판의금독판내무부사, 좌참찬, 병조판서, 홍문관 제학, 우부빈객, 판윤, 좌부빈객, 궁내부 특진관, 태의원경, 경효전 제조, 규장각 학사 겸 일강관, 전선사 제조, 양지아문 총재관, 판돈녕, 학부대신, 궁내부 대신, 농상공부 대신, 박람회사무소 위원장, 중추원 의장, 규장각 지후관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1894년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 홍종우를 시켜 망명중인 개화파 김옥균을 암살을 사주했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시찰을 했으며, 이 해에 임시국민대연설회 발기 및 회장, 1910년 대한평화협회 찬성장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 이후 한일합병 공로로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대한제국으로부터 1907년 팔괘장을 받았으며, 일본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과 1915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받았다.
민영소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57∼66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