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응(德凝), 호는 대암(大菴). 박성림(朴成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박순(朴純)이고, 아버지는 생원 박사눌(朴思訥)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김연(金緣)의 딸이다. 배신(裵紳)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를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종사했고, 정유재란 때 조목(趙穆)과 상의해 의병을 일으켜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에 들어갔다. 그 뒤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다가 공조좌랑을 지내고,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전쟁 때는 명나라 군사를 접응하고 장정(壯丁)을 동원해 군인에 충당하며 보급 물자를 수송하고 병기를 수리하는 등 공적이 많았다. 뒤에 박성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고, 청송(靑松)의 주왕산 아래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공적을 가상하게 여겨 공조정랑·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과 임천(林川)·영천(永川)·익산(益山) 등의 군수·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청송부사 등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심정기(誠心正己)의 학문을 추구했으며, 과거시험에 뜻을 버리고 공맹(孔孟)의 글을 읽었다.
만년에는 더욱 『논어(論語)』를 좋아해 거처하는 집에 학안재(學顔齋)의 현판을 걸어놓고 동료(東寮)를 사물(四勿), 서료(西寮)를 박약(博約)이라 부르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글을 배우러 오는 이에게는 먼저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사람이 되는 길을 깨닫게 하였다.
처음 정인홍(鄭仁弘)과 교류해 사이가 좋았으나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결하는 것을 보고 못마땅해 하였다.
더군다나 정인홍이 『남명집(南冥集)』의 발문에서 이황(李滉)을 배척한 어구를 보고 “세상에 선정(先正)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라 하고 절교하였다.
또한, 김성일의 참모가 되었을 때 적세가 사나워져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성이 김성일에게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경상 우도(慶尙右道)를 보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묻자, 김성일은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은 신하는 봉강에서 죽을 뿐이다. 그대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라.”라고 했으나 끝내 떠나지 않았다.
김성일이 역질에 걸렸을 때 다른 막료들은 모두 피했으나 박성은 끝내 옆에서 간호하는 등 의리를 지켰다. 교우는 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顒)·장현광(張顯光)·권호문(權好文) 등으로 서로 내왕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저서로는 『대암집(大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