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

방응모
방응모
언론·방송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관료. 광업가 ·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춘해(春海), 계초(啓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4년(고종 21) 1월 3일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온양(溫陽)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
관련 사건
조선민립대학기성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관료. 광업가 · 언론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84년 1월 3일 평안도 정주에서 아버지 방계준(方啓畯)과 어머니 온양박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호는 춘해(春海)이며 뒤에 계초(啓礎)로 고쳤다. 일제강점기에 교동광산 사장, 『조선일보』 사장, 조선신궁봉찬회 고문, 『조광』 발행인,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납북되어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9년부터 1899년까지 정주 소암리 족지서당에서 스승 승창률(承昌律)로부터 한학을 익혔다. 1898년 승시영(承時榮)의 둘째 딸 승계도(承啓道)와 결혼했다. 1901년부터 2년간 집을 떠나 함경도에 있는 서당에서 훈장으로 있다가 1903년 정주로 돌아왔다. 1907년 7월경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듣고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4년간 이름 없는 작은 학교를 다녔다.

1911년 정주읍내 변호사사무소에서 1914년까지 대서업에 종사했다. 1915년 정주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살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시작했고, 그 무렵부터 오산학교 학감으로 있던 전우현(全禹鉉)과 교우관계를 맺었다.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후 지국으로 승격되어 정주지국장에 임명되었다. 7월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평등권 신장을 위해 여자교육회를 열었고, 수해가 나자 ‘정주군 수해구제회’를 조직해 봉사활동을 했다. 1923년 4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준비회 집행위원으로 참여해서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정주지방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있으면서 이승훈(李昇薰)·조만식(曺晩植)과 교유했다.

1924년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한 후, 1926년 7월 3년간 굴을 파던 갱도에서 금맥이 발견되어 굴지의 광산업자로 성장했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이 되었는데, 이 무렵 경성을 자주 드나들며 조만식의 소개로 1928년 자신의 호를 딴 춘해장학회와 장학생들 모임인 이심회(以心會)를 만들었다. 1930년 3월 정주에서 평안북도 도평의회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교동광산은 성장을 거듭해 1930년대에는 종업원수가 1,113명에 이르렀으며, 1932년에 135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1932년 6월부터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3월 23일 자금난에 허덕이는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인 3월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1933년 7월 『조선일보』는 자본금 30만원의 주식회사가 되었고 사장으로 취임해 1940년 8월 폐간할 때까지 재임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 겸 고문으로 참여했으며, 1934년 3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같은 해 수원군 팔탄면 노하리 일대 100만 평을 간척했고, 함경남도 영흥군 10만여 정보를 임대해 제지업 목적으로 조림사업을 했다. 1936년 동방문화학원과 고계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1937년 5월 심전(心田)개발운동에 앞장서는 조선문예회 제2부 문학위원, 7월 경성군사후원연맹 위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20일 경성방송국에서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시국강연을 했으며,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시국강연의 연사로 포천, 파주, 김포, 강화, 부천 등 경기도 일대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1938년 1월 조선총독부가 언론 통제를 하기 위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한 조선춘추회 발기인 겸 간사로 추대되었다. 2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축하회 발기인,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경성연맹 창립총회 상담역,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 제2부(의례와 사회풍조 쇄신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2월 경성부육군병지원자후원회 고문, 7월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이 되었다.

1940년 3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했고,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로 선임되었다. 그해 『조광』 11월호 권두언에서 일본 국민으로 충성할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1941년 1월 조선일보사 사명을 동방흥업(東邦興業)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를 결성할 때 참여하고 9월에 이 단체에서 조직한 채권가두유격대에 종로대 일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할 때 경성지역 발기인을 맡았고 10월에 이사로 선출되었다. 1941년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조광』1942.2.)라는 글을 발표했다. 1944년 9월 군수산업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감사역을 맡았다.

해방 후 1945년 8월 말과 9월 초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고문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1월 23일 『조선일보』를 복간했다. 이후 12월까지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 대한국민총회 발기인,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발기인,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5월 조선공업구락부 고문, 8월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9월 독촉국민회 총무부장으로 일했다. 1950년 양주군에서 무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방응모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4·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25∼58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계초 방응모』(이동욱, 방일영문화재단, 1996)
『인물한국언론사』(정진석, 나남출판, 1995)
『매일경제』(1983.6.1.)
『친일파군상』(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여강출판사, 1986)
『계초 방응모전』(계초전기간행회 편, 조선일보사, 1980)
『조선일보 60년사』(조선일보사, 198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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