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수초(遂初).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郎) 배시망(裵時望)이다.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에서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위사(衛士)를 모집할 때, 이에 응모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어 전사 300인을 거느리고 안릉(安陵)에 이르러 많은 후금군의 목을 베었다. 그 공으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에 승진하였다.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감찰(監察)·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을 역임하고,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외직에 나아가 많은 치적을 쌓았다. 그 뒤 절충장군(折衝將軍)·함경북도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덕원도호부사(德源都護府使)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영장(營將)으로 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를 따라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킬 때, 왕이 40여 일간 남한산성에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元帥)와 남북절도사들이 모두 양근(楊根)에 모여 청나라 군사를 두려워해 진병(進兵)을 꺼리었다. 이에 통분하여 싸울 것을 결심했으나, 주장(主將)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모든 장수들은 군사를 파하고 돌아갔으나, 배명순은 철수하는 청나라 군사와 철령(鐵嶺)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리고 퇴각하는 청나라 군사의 뒤를 추격,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적의 동태를 살핀 후 진격하려 했으나, 적을 얕본 주장의 명령으로 밤에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덕원도호부에 추사비(追思碑)가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