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대구(大邱).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 아버지는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배영(裵瑩)이다.
10세에 금위(禁衛: 대궐 경호 군대)에 들어가 도지(都知)가 되었다. 1270년(원종 11)에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나이 11세로 왕을 호종하여, 그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1291년(충렬왕 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는데, 이 때 화살이 턱뼈를 관통하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전과를 거둠으로써 중랑장(中郎將)에 특진하였다.
그 뒤 인후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원제(元帝)로부터 용사라는 칭찬을 받고 백금을 받았다. 뒤에 충청·전라 양도 찰방이 되어 간교한 자들을 억누르고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보살펴서 그 일대가 평온해졌다. 충선왕(忠宣王) 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전농사(典農司)와 유비창(有備倉)의 일을 관장하였다.
1318년(충숙왕 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목사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1321년에 옥사가 일어나 귀양갔다가 풀려나온 뒤에는 거문고와 바둑으로 여생을 보냈다. 배정지는 체구가 크고 무인의 재략(才略)에 뛰어났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