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운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백남운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백남운 전후면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고,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의 민족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경제학자 · 교육자 ·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79년
출생지
전라북도 고창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남운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 등을 저술한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다. 1895년에 태어나 1979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 하에서 한국의 원시·고대·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했고 조선사정연구회사건으로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조선학술원과 민족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민족주의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다가 월북하여 북한에서 교육상·과학원 원장·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고,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의 민족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한 경제학자 · 교육자 · 정치인.
개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생. 일제강점 하에서 한국의 원시 · 고대 · 중세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한국의 경제사학 발전에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다. 월북한 후에는 북한의 고위 직책을 역임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수원고등농림학교와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1925∼1938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33년에는 우리나라 원시 · 고대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사회경제사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발간하였다.

한편, 1922년부터 이승훈(李承薰) · 한용운(韓龍雲) · 조만식(曺晩植) · 허헌(許憲)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 1923년 4월에는 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결성하고 중앙부에서 활동하였다. 또, 국내민족운동에서 민족개량주의노선이 대두되자, 1929년 9월 백남훈(白南薰) · 백관수(白寬洙) · 김준연(金俊淵) · 홍명희(洪命熹) 등과 같이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李順鐸) · 노동규(盧東奎) 등 동료 교수 그리고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8 · 15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조선학술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군정의 임명사령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6년 2월에는 김두봉(金枓奉) · 한빈(韓斌)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후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발족)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의장 및 상임위원 · 경제대책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독립신보』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조선인민당 · 조선공산당 ·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이 발족할 때에는 여운형(呂運亨) 등과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5월에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설하여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곧 월북하였다.

월북 후 1948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9월에 교육상을 역임하고, 1952년에 과학원 원장, 1961년에 최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에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4년에는 조국전선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평가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서문에서 “조선의 학문발전도는 대개 삼국시대 이래의 한문학 · 불학(佛學) · 노장학(老莊學) · 유학 등을 포함한 방대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으나, 어떠한 것이든지 그 사회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의 내면적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조선사상의 유형원(柳馨遠) · 이익(李瀷) · 이수광(李睟光) · 정약용(丁若鏞) · 서유구(徐有榘) · 박지원(朴趾源) 등 현실학파(現實學派)라고도 일컫는 우수한 학자가 배출되어 우리들의 경제학적영역에 대한 선물로 남겨놓은 업적은 결코 적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나의 조선경제사의 기도(企圖)는 사회의 경제적 구성을 기축으로 하여 제1을 원시씨족공산체의 태양(態樣), 제2는 삼국의 정립시대의 노예경제, 제3은 삼국시대의 말기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아시아적 봉건사회의 특질 등을 열거하고, 금회(今回)는 우선 제1 · 제2의 문제를 취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자료의 취급상 미숙, 이론전개의 불충분 등 필자 자신에게도 불만점이 적지않다.”고 하고 “더욱이 사관(史觀)으로서의 방법론상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나 심히 두려워한다.”고 말하였다. 이 책은 주로 원시씨족공산체와 삼국시대의 노예경제를 취급하였으며, 금후 속간계획인 조선경제사의 제1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사연구의 방법론’으로 “조선사의 연구는 바로 과거의 역사적ㆍ사회적 발전의 변동과정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규명하는 동시에, 그의 실천적 동향을 이론화함을 임무로 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인류사회의 일반적 운동법칙으로서의 사적변증법에 의하여 그의 민족생활의 계급적 제관계 그리고 사회체제의 역사적 변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그의 변칙성을 일반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7년에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을 발간하였다. ‘조선사회경제사 제2권’으로 되어 있어 1933년의 『조선사회경제사』의 속편임을 알 수 있다.

이 저작의 내용은 “봉건전사의 전기(前期)부분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반도봉건사의 효시이며, 그리고 가장 정력적 · 전형적인 아시아적 봉건국가로서의 고려사회를 인식의 대상으로 한 점에서 스스로 그 전승형태인 조선에 관한 부분의 이해에도 적지않은 편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연구에서 이 책의 의의를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우리나라의 원시 · 고대 · 중세에 해당하는 삼한 · 삼국 · 고려조까지의 사회경제에 관한 경제사적 연구에 몰두하여, 그의 방법론의 성격여하를 불문하고, 큰 업적을 남김으로써 우리나라 경제사학 발전에 개척자적 구실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서

대표적인 저서로는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1937), 『조선민족의 진로』(1946) 등이 있다.

상훈

1955년과 1958년 북한 정부로부터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참고문헌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1930·40년대 백남운의 학문과 정치경제사상』(방기중, 역사비평사 1992)
『북한인물록』(국회도서관, 1979)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창순·김준엽,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3)
『조선연감』(조선통신사, 1948)
『조선민족의 진로』(백남운, 신건사, 1946)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백남운, 개조사, 1937)
『조선사회경제사』(백남운, 개조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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