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214,125㎡.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심한 도굴로 인하여 최성기의 우수한 파편을 간직한 요지의 퇴적층은 완전히 파괴상태에 있으며, 그 밖의 지역도 거의 논밭으로 변하여 보존상태가 극히 불량하다. 1967년 국립박물관에서 도굴된 퇴적층의 일부를 시굴(試掘)하여 파괴 · 교란된 상태를 수습 · 조사하였을 뿐, 정식으로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한 적은 없다.
요지는 모두 40여 개소로, 대부분이 유천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의 남쪽 측면에 밀집되어 있고 도로 북측 야산 기슭에도 10여 개소가 산재하며 유천초등학교 뒤편 구릉에도 널려 있다.
요지는 굴포만에 면한 광활한 들판에 위치하며 토성으로 둘러싸인 안쪽 구릉에 주로 널려 있다. 가마의 형태는 발굴, 조사된 바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낮은 구릉을 이용한 등요(登窯)의 구조로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곳 요지에서 수습된 자기편을 보면, 기형은 투각 돈(墩)을 비롯해서 방형의 청자판(靑磁板), 대반(大盤), 접시, 전접시, 대야, 장구, 종(鐘), 탁잔(托盞), 화분(花盆), 합(盒), 발(鉢), 완(碗), 각종 매병(梅甁), 주병(酒甁), 유병(油甁), 향로, 항(缸), 침(枕) 등 다종다양하며, 특히 1m 이상 되는 매병의 예가 있어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문양은 오목새김[음각], 돋을새김[양각], 투각, 상형(象形), 상감, 퇴화(堆花), 진사(辰砂), 철회(鐵繪), 철채(鐵彩) 등의 다양한 수법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국화, 모란, 연화, 운학(雲鶴), 구름, 초화(草花), 운룡(雲龍), 파도, 물고기, 석류, 보상화, 봉황 등은 주로 상감기법으로, 연판(蓮瓣)은 돋을새김으로, 귀갑, 고리문은 투각으로, 상감기법으로 자주 표현되는 운룡, 모란, 국화와 함께 화훼(花卉) 등은 오목새김으로, 화문(花紋)은 퇴화문으로 나타내는 등 고려시대의 다양한 문양들이 발견되었다.
유색도 녹청(綠靑), 담청(淡靑), 담녹(淡綠), 녹갈, 황갈, 천청색(淺靑色 : 짙은 옥색) 등 다채롭다. 그중 비색(秘色)이라 일컫는 천록(淺綠)을 머금은 청색류의 청자가 많은데, 대체로 미세한 유빙렬(釉氷裂)이 있고 투명하다. 태토(胎土)는 정선되었으며 회색 · 회백색을 띠고 있다. 굽받침의 경우 작은 기형은 대체로 규석 받침으로 정교하게 구웠으며, 큰 기형은 내화토(耐火土)와 모래를 섞어 빚은 비짐흙을 받쳐 구운 흔적이 많다.
40여 개소의 유천리 요지 중에서도 12호 요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요지에서 출토되는 도자편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내 요지에서 출토된 우수한 도자편과 거의 비슷하다. 동시대 고려 귀족사회의 많은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강진과 더불어 이곳에서도 양질의 도자기가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진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 청자 제작지로 꼽히는 이곳 요지에서는 최전성기의 순청자와 상감청자뿐만 아니라 고려백자, 상감백자, 진사백자, 투각돈, 1m 이상의 매병 등이 출토되어 더욱 주목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