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원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의 간쟁(諫諍) · 논박(論駁)을 관장하던 관서.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간쟁(諫諍) · 논박(論駁)을 관장하던 관서.
내용

언론 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 간원(諫院) 또는 미원(薇院)이라고도 하였다. 관원은 간관(諫官)이라고 하며, 사헌부의 관원인 대관(臺官)과 병칭해 대간(臺諫)이라 한다.

연원은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산기(散騎)·간의대부(諫議大夫)에서 찾을 수 있다. 간관 제도는 당·송시대에 정비되어, 문하성(門下省)과 중서성(中書省)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간의대부·보궐(補闕) 또는 사간(司諫)·습유(拾遺) 또는 정언(正言) 등의 관직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간관 제도는 당·송대의 제도를 많이 본받았고,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郎舍)가 간관이었다.

고려시대의 중서문하성과 낭사의 직제는 10여 차례 변동이 있어 그때마다 차이가 있었다. 관직명으로는 산기상시·직문하(直門下)·간의대부·급사중(給事中)·중서사인(中書舍人) 또는 문하사인(門下舍人)·기거주(起居注)·기거랑(起居郎)·기거사인(起居舍人)·사간·보궐 또는 헌납·습유 또는 정언 등이 있었다.

1392년(태조 1) 7월의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는 고려 말의 문하부 낭사(門下府郎舍)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1401년(태종 1)에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할 때 문하부 낭사는 독립되어 사간원이 되었다. 중국과 고려시대에 중서성·문하성의 하위직 관원[郎舍]이었던 간관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관부가 된 것이다. 이때 사간원의 직제는 세조 때에 몇 차례의 변동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고정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가 개혁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간원의 직무는 고려시대에는 간쟁(諫諍)과 봉박(封駁 : 옳지 않음을 글을 올려 논박함)이었다. 1392년에는 ① 헌납간쟁(獻納諫諍), ② 박정차제(駁正差除), ③ 수발교지(受發敎旨), ④ 통진계전(通進啓牋 : 계문이나 상소를 왕에게 알리거나 올림)이었다. 이 당시 문하부 낭사의 직무는 간관으로서의 기능(①, ②)과 왕명과 문서의 출납 업무(③, ④)였다. 그러나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혁파될 때 간관의 업무는 독립하여 사간원이 되었고, 출납 업무는 승정원으로 이관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간원의 직무는 ① 간쟁, ② 논박이었다. ①은 왕에 대한 언론으로서, 왕의 언행이나 시정에 잘못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한 언론이고, ②는 일반 정치에 대한 언론으로 논박의 대상은 그릇된 정치일 수도 있고 부당, 부적한 인사일 수도 있다. 즉, 사간원의 제도상의 직무는 왕과 정치에 대한 언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간원의 기능을 정치의 실제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언론 활동이다. 당시 언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상적인 유교 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언론을 직무로 하는 관부로는 사헌부가 있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을 일컬어 ‘언론 양사(言論兩司)’라고 하였고, 홍문관을 합해 ‘언론 삼사’라고 불렀다.

사간원의 언론 내용은 크게 ① 간쟁, ② 탄핵, ③ 시정, ④ 인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은 언론의 중심이 되는 기능이며, ②는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언론으로, 비위, 불법을 행한 관원을 논란해 직위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탄핵은 제도상으로는 사헌부의 직무이나 실제는 사간원에서도 행하였다. ③은 그 시대 정치의 득실을 논해 바른 정치의 실현을 위한 언론이며, ④는 부정, 부당, 부적한 인사를 막기 위한 언론이다.

둘째, 정치의 핵심적인 기관 중의 하나였다. 사간원의 관원은 왕이 중신을 접견해 정치적 보고와 자문을 받는 자리인 조계(朝啓 : 죄인에게 논죄할 일에 대하여 왕에게 물음)와 상참(常參)에 참여했고, 의정부·육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도 참여하였다.

셋째, 시신(侍臣)으로서의 기능도 있었다. 왕을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에 입시했고, 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인 서연(書筵)에도 입시했으며, 왕의 행행(行幸)에도 반드시 호종하였다.

넷째, 서경(署經)의 직권이 있었다. 고신(告身)과 의첩(依牒: 의정부에서 논의한 안을 대간에서 서명한 것을 예조에서 상세히 검토한 뒤에 보내는 공문서)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심사와 동의를 거치게 되는데, 이 절차를 거치는 것을 서경이라 한다. 고신에 대한 서경은 고려시대에는 1품에서 9품에 이르는 모든 관원에 대해 행해졌으나, 조선시대에는 5품 이하의 관원에 한정하였다. 대간의 서경은 인사 행정과 법령의 제정 및 개정에 신중을 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적인 장치였다.

간관의 자격은 당해원(當該員)과 그 내외사조(內外四祖)에 흠이 없어야 됨은 물론이고, 강개(慷慨)한 언론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일단 간관이 되면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신분의 보장과 특별한 예우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예로 대간은 포폄(褒貶)을 받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당상관도 정중히 답례를 하도록 한 것을 들 수 있다.

간관은 대관과 병칭해 대간이라 하지만 집무하는 분위기는 크게 달랐다. 대관은 부(府) 안에서 상하관(上下官) 사이에 예의와 의식이 엄격했으나 간관은 상하관 사이에 존비(尊卑)의 예가 없고, 직무 중[完議席]에 술을 취하도록 마셔도 문책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간관에 대한 특별한 대우는 직책상 그들이 당하는 위험부담에 대한 반대급부라고도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사간원은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어 폐단이 생기기도 했고, 왕권의 탄압을 받아 그 기능을 상실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의정부·육조·사헌부 등과 더불어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서 기능이 원만히 수행되면 왕권이나 신권(臣權)의 독주를 막고 균형있는 정치를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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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의 법제사적고찰」(이홍렬, 『사총』5, 1960)
집필자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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