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미증식계획 ()

근대사
제도
1920년부터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쌀 증식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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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0년부터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쌀 증식정책.
개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업 부문의 식민지적 재편을 완료한 일본 제국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급성장한 일본 독점자본의 요구에 부응,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삼기 위해 1920년부터 3차에 걸쳐 추진한 식민지 경제정책이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의 5개년 계획이었다. 제2차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의 10개년 계획이었다. 그런데 10개년 계획이 1934년에 중단된 것은 조선미의 대일수출 증대로 일본 농업이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 침략을 개시하였다. 군량미 수탈을 위해 다시 조선미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1940년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이것이 전시 중에 실시된 제3차 산미증식계획이다.

역사적 배경

일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산업자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독점자본이 강화되면서 대중생활은 궁핍화했고, 특히 농촌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일본의 농업 생산력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증대되고 있던 조선미에 대한 수요는 대전 후 격증하였다.

더욱이, 1918년에 대규모의 쌀폭동이 일어난 데다가 1920년부터 대불황이 닥쳐왔다. 따라서, 자연 자원의 부족 및 농업 발전의 정체에 기인한 식량과 원료 부족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일본 독점자본은 식민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의 식량 증산을 강행해 식량의 안정된 공급로를 확보해야 할 절박한 사정에 처했던 것이다. 조선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이미 완료되어 식량 공급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을 과잉 상태의 독점자본을 투하할 시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또 자국의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한 식량 공급지로 전환시키기 위해,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였다.

내용
  1. 추진 분야

세 차례에 걸쳐 계획 실시된 산미증산계획은 농지 개량에 의한 것과 농사 개량에 의한 것, 두 가지 부문에서 추진되었다. 농지 개량에 의한 증산 계획은 관개시설의 개선, 지목교환·개간·간척에 의한 농지 확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농사 개량에 의한 계획은 품종 개량·퇴비 장려·적기 번식·심경·제초운동 등을 전개해 단위 면적에서의 수확량을 증가시키자는 것이다. 1917년에 이미 「조선수리조합령」을 발포하여 수리조합을 창설하고 수리시설의 개량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에서는 토지 개량 및 증산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없었으므로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수리조합은 산미증식계획의 수립과 함께 비로소 활동을 개시하였다.

  1. 제1차 계획

산미증식운동이 본격적으로 계획 실시된 것은 1920년에 들어서부터이다.

농지 개량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0년 11월 식산국에 토지개량과를 신설해 농업수리·토지개량·국유미개간지개척 등 일체의 사무를 관장시켰다. 또, 같은 해 이 사업에 필요한 「토지개량사업보조규칙」과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을 공포하였다.

농사 개선을 위해서는 이미 1906년 통감부 시대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였다. 1908년 종묘장을 도청 소재지에 설치한 이래 1911년부터는 종묘장을 확장시켜왔다. 제1차 산미증식계획 수립과 더불어 1911년 종래의 종묘장 시설을 쇄신하고, 읍·면 채종답의 경작자에게는 보조금을 주고 5개년 만에 한 번씩 우량 종자를 바꾸었다.

그리고 권업모범장이 조선 풍토에 맞는 신품종의 육성을 담당하게 하고, 각 도 종묘장이 각각 장려 품종을 정하게 하였다. 그 결과 1926년까지 종자 갱신은 100만 정보를 돌파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종전의 자급 비료와 함께 판매 비료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전체적으로 조선내 미곡 증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계획을 갱신해 1926년부터 제2차 계획을 세우고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 제2차 계획

조선총독부는 제2차 계획에서 토지개량사업을 한층 강행하기 위해 우선 관제 및 법령을 정비하였다. 1926년 6월 식산국 산하에 이미 설치되었던 토지개량과 외 수리과와 개간과를 신설하였다. 1927년 5월 다시 토지개량부를 설치하고 위의 3과를 통괄해 증산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7년 12월 「조선토지개량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해 수리조합사업의 건전한 발달을 기하기로 하였다.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개량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는 해 정부의 원조 하에 토지개량사업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제2차 산미증식갱신계획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1926년 이래 12개년을 기해 35만 정보의 토지 개량을 실시하고 농사 개선을 병행해 472만 석을 증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토지개량사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농사 개선을 위해 1928년 권농공제조합이 창설되었고, 1929년 수원 권업모범장을 농사시험장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남한 지방의 미작 개량사업을 전담하기 위해 1930년 이래 농사시험장을 각지에 확장시켰다. 여기에서 조선의 기후 풍토에 적합한 품종 개량을 실시하고 재배법을 개선해 일반 농가에 보급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러한 농사개선사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아 단위 면적에서의 미곡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제2차 계획기간 중 토지개량사업으로 개량된 면적은 14만 2095정보였다. 이로써 증대된 수확은 117만 3000여 석이었다. 이것은 전체 계획 472만 석의 25%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 수리조합도 증가하였다.

그 동안 창설된 조합은 123개 소이고, 몽리면적은 1만 5364정보에 달하였다. 결국, 제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의 미곡 생산량은 상당한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동시에 이 기간에 대일미곡 수출이 격증하였다. 이처럼 수출량이 격증한 것은, 일인당 소비량의 감소 희생 위에 대일수출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대일미곡 수출 강행으로 국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해서 만주 잡곡 도입이 격증하였다. 한편, 조선미의 대일 수출이 격증하자 따라 일본 농업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품질에 있어서 조선미보다 열등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고가였기 때문에, 조선미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일본미가가 폭락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1930년대부터 일본농민들 사이에 조선미 배척운동이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난국에서 자국의 농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1932년 11월 미곡통제조사회를 설치하였다. 다음 해 3월에는 「미곡통제법」을 공포하여 조선미 수입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사태에 직면한 조선총독부는 1933년 1월 조선미곡위원회를 설치해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더구나 1933년 조선의 미곡 생산이 대풍작을 보자 총독부는 미곡의 장기 저장을 장려하는 등의 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다음 해인 1934년, 산미증식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산미증식계획을 중단한 조선총독부는 허구에 가득찬 농촌진흥운동이라는 것을 추진했으나 이것은 자력갱생이라는 구호 제시에 그쳤을 뿐이다.

  1. 제3차 계획

1939년에 들어서부터 조선 미곡 증산계획은 다시 제기되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군대와 군수산업 건설에 많은 농민이 징발되어 일본의 국내 농업은 노동력이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일본에서의 쌀 생산량은 감소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미는 대륙파견군의 식량을 담당하게 되어 그 증산이 또 다시 요청되었다. 그러나 1939년 조선에서는 미증유의 대한발이 있어서 예년에 비하여 약 40%의 감수를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향후 10개년을 기해 680만 석의 증산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제3차 산미증산계획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추진했기 때문에 많은 자재와 자본을 투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제3차 계획에서는 제1·2차 계획에 있어서와 같은 토지 개량에 의한 증산보다도 농사 개선에 의한 단위면적당 수확량 증대에 중점을 두었다.

제3차 계획에서는 농사 개선에 의한 증산 목표를 511만 석, 토지개량사업에 의한 증산 목표를 169만석으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토지개량사업은 소극적인 개량에 불과했고, 농사 개선도 계획된 1단보당 3석이라는 것부터가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더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인적 자원과 비료 부족이 가중되어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제3차 증산계획은 한낱 계획에 그쳤을 뿐이었다. 그 뒤 조선총독부는 국내 미곡 소비량을 절약하여 대륙주둔군의 식량을 공급하는 소극적인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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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최호진, 박영사, 1970)
「쌀이 없는 증산」(주종환,『한국현대사』4, 1973)
「일제식민지통치하의 한국농업」(박현채,『창작과 비평』25, 1972)
『施政三十年史』(朝鮮總督府,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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