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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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고려시대사
유적
문화재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천은사에 있는 고려후기 문신 이승휴 관련 복합유적. 연못터 · 가마터.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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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천은사에 있는 고려후기 문신 이승휴 관련 복합유적. 연못터 · 가마터. 사적.
개설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1280년부터 1289년까지 약 10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용안당(容安堂) · 지락당(知樂塘) · 보광정(葆光亭) · 표음정(瓢飮渟)을 지었다. 그리고 삼화사에서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 읽으며, 『제왕운기』 · 『내전록』을 저술하였다. 이후 1294년(충렬왕 20) 홀연히 용안당 간판을 간장사(看藏寺: 현재 천은사)로 개칭하고 승려가 주석할 밭을 희사하였다.

내용

유적이 소재한 천은사는 본래 신라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사명(寺名)은 ‘백련대(白蓮臺) → 간장암(간장사) → 흑악사(黑嶽寺) → 천은사(天恩寺)‘로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여기서 ‘간장암(간장사)’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승휴의 「보광정기(葆光亭記)」와 「간장사기(看藏寺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승휴는 강계의 난, 몽골의 침략 등 사회적 격변기에 활동하였다. 이승휴는 관료로서 감찰 · 언관의 역할을 많이 하였으며, 서장관으로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원을 치켜세우면서도 고려의 자주 의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안거사집』에 실린 다양한 시(詩)와 우리 민족사를 서사시 형태로 서술한 『제왕운기』는 문인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고려 충렬왕 때 고쳐야할 폐단 10개조를 올려 파직된 후 삼척에 내려와 두타산 자락인 구동 즉, 현재의 삼척시 천은사 경내에 용안당을 비롯한 몇 가지 시설을 지어 10여년간 머물렀다. 이승휴가 남긴 유적은 2000년 9월 16일 사적 ‘삼척두타산이승휴유허’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삼척두타산이승휴유적’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 경내에 있는 이승휴 관련 유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지락당(知樂塘)

연못지를 지락당이라 하였다. “지락당”이란 명칭은 “어찌 내가 고기의 즐거움을 모름을 알겠는가”라는 장자 제물편의 말을 취하여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찰에 조성된 연못지는 대부분 연꽃을 심어 조경했는데 이곳에도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네모난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최대 장축이 동서 14m, 남북 16m로 면적은 약 224㎡(68평) 정도이다. 현재 남아 있는 호안석축에 의한 연못지만이 확인되고 있으며, 선대에 조성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호안석축은 최대 높이가 2.2m정도인데 1.6m까지는 50m~80m 가량의 석재를 사용하여 쌓은 것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아래층인 선대의 석축은 장방형의 석재를 허튼층쌓기를 하면서 퇴물림 방식으로 강하게 쌓은 반면 후대의 석축인 상위의 석축은 방형에 가까운 석재를 허튼층쌓기 방식의 퇴물림 방식으로 약하게 쌓았다.

현재 노출된 연못지의 바닥은 하상층의 자갈과 굵은 모래층으로 형성되었으며 거대한 자연석재가 군(群)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다른 연못지에서도 볼 수 있는 조경석으로 놓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호안석축은 동측만이 축성되었다. 외면에는 물이 새는 방지책을 마련하지 않고 내면에만 잡석으로 마감하였다. 호안석축의 기단은 없으며 하천의 지표위에 자연석을 그대로 쌓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남측은 자연석이 연못지를 향하여 비스듬히 놓여 자연벽을 이루었으며 서 · 북측은 하상층의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지면서 거대한 바위가 호안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입수구는 별도의 시설이 되지 않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유입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수구도 별도의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출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측은 어느 시기엔가 붕괴되어 작은 자연석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1. 청자 도요지

용안당 건물 뒤편의 동북쪽으로 난 당시의 암자인 화엄암과 부도군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 산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가마유구는 전체 1개소로 북서-남동향의 자연 경사면과 같은 방향으로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유구는 길이 남북 320㎝, 동서 440㎝의 규모로 평면 장타원형의 소규모 가마이다.

가마의 벽체는 대부분 유실되어 완전하게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현존하는 북벽은 2~3단 정도의 높이 66㎝로 벽체에 사용된 석재들이 조금 남아 있는 편이다. 남벽은 거의 유실되어 윤곽선만 남아 있다. 서벽은 두께 38~54㎝, 높이 38㎝로 모서리 부분의 석재들은 불먹은 흔적이 완연하다. 입구부는 대나무숲과 계곡에 바로 접하고 있는 관계로 확인을 못하였으나 대부분의 유물들과 소토들이 입구쪽과 소성실 중앙부에서 확인되었다.

이 가마는 외형상으로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장타원형의 가마로서 그 구조는 소성실이 1개인 단실요이며 바닥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하면을 약간 파서 조성하였고 천정은 남아 있지 않지만 등요와 같은 지상 토축일 가능성이 높다. 소성실의 바닥면은 진흙을 깔아 처리하였으며 경사가 거의 없는 편이고 고온의 불길이 닿아 비교적 굳게 익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이 청자요 유구의 원형이 대부분 상실된 관계로 그 구조의 정확한 양상을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강원도 지방에서 확인된 최초의 청자 가마터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습된 유물들은 대접이 가장 많으며 그밖에 접시, 완, 도지미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의 양상으로 볼 때 이 가마는 12~13세기에 사용한 가마로 추측된다. 이것으로 보아 이승휴가 이곳에 용안당을 짓고 은거하며, 불경을 읽는 등 불교에 심취해 있을 때에도 사용되었던 가마로 추측된다.

  1. 용안당 · 보광정

이승휴가 주석할 당시에 만들었다는 용안당과 보광정 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간장사기」를 통해 이승휴가 주석하였던 용안당이 간장사이며, 이는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과 고지도(古地圖)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용안당 · 보광정에 대하여 『동안거사집』 「보광정기」에 실려있는 관련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타산(頭陀山)의 중대동(中臺洞)은 기이하고 절묘하여 신기한 경치를 다 드러냈고, 묶어 놓은 듯도 하고, 편편하기도 하며, 옹기종기 땅을 웅축해 놓은 듯한 곳이다. 거기에다 거닐고 의지하기 편리하니 그 아름다움을 이루 다 형용하기가 어렵다. 만일 동파가 이곳을 본다면 의당 서시로써 비교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 노닐며 구경하는 운치는 곧 십사관시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중대동의 동북쪽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홀로 솟아 머리처럼 생기어 펑퍼짐하게 흘러내리는 산봉우리가 있으니, 그것은 대문수라 부르고, 대문수 남쪽에 솥발처럼 솟아 일어난 것이 훌쩍 날아오르는 듯한 것은 삼공봉이고, 비스듬히 경계진 양쪽 골짜기 사이에 돌고 굽이져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포포천이다. 내의 북쪽에 문수봉에 딸린 겹친 산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삼공봉을 바라보고 있으며, 우묵하고 널찍하여 물이 안고 도는 곳으로서, 특별히 하나의 작은 구역을 이루고 있느니, 이곳이 구산동이다.

구산동을 가로질러 서북쪽에서 동남으로 콸콸 흘러가는 물줄기가 용계이다. 용계를 따라 양쪽 가에 밭 이경이 있으니, 이것은 동안거사 외가에서 전해오는 토지이다. 땅은 비록 메마른 박토이지만 몇 식구의 집안이 의지해서 먹고 살만하다. 이에 시내 서쪽 밭의 잘록한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심용슬지이안(審容膝之易安)’이란 구절의 글귀를 취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

당의 남쪽에 차가운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는데, 가물어도 더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으며, 차고도 차가워서 시원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손으로 움키기도 전에 몸이 이미 청량해진다. 그로 인하여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소나무, 대나무를 섞어서 심고 화초를 빙 둘러 심어 놓으니 비록 소박하여 화려하지는 않으나, 누추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남화진인의 제물편에 나오는 글귀인 '물은 주입해도 가득해지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으며 그 나오는 근원을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을 보광이라 한다'를 취하여 이름을 ‘보광정’이라 하였다."

  1. 표음정

이승휴가 주석할 때 만들었다는 표음정 터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에 대하여 『동안거사집』 「보광정기」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보광정 가운데에 엷은 돌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고, 그 가운데 작은 우물을 파서 음식 짓는데 쓰일 수 있도록 해놓고 설당거사 소동파의 전중시의 '한 번 배부름은 기약할 수 없으나 한 바가지 물은 기필할 수 있다.'라는 시구를 취하여 ‘표음정’이라 하였다."

천은사 경내는 아니지만, 삼척지역 내의 이승휴 관련 유적은 이승휴가 머물렀던 용안당에서 삼화사로 불경을 빌리러 다녔던 옛길인 ‘돌머들 - 흥태골 - 저수 고개[지시 고개], 국시 - 작은 당골<고양뎅이 - 횟골> - 서낭댕이 - 정거리 - 옛 삼화사 터’, 이승휴에게 불경을 빌려 주었던 삼화사, 안집사 병부시랑 진자사와 함께 죽서루에 올랐다가 판상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쓴 죽서루,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입보한 ‘요전산성’이 있다.

그리고 1995년 천은사 경내인 지락당 터 옆에 이승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동안사(動安祠)’를 건립하였고, 이후 이승휴를 기리는 동안대재를 매년 10월 3일 이곳에서 봉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척주지(陟州誌)』
『삼척 천은사(天恩寺) 이승휴 유허지 발굴조사 보고서』(강원문화재연구소·삼척시, 2006)
『삼척 천은사 이승휴유허지 발굴조사 보고서』(관동대 박물관·삼척시, 1999)
「동안 이승휴선생의 생애와 관련 유적」(김도현, 『박물관지』 23,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2016)
「동안 이승휴의 불교 인식과 간장사」(김도현, 『이사부와 동해』 10, 2015)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의 역사와 목조아미타불 복장」(김도현, 『박물관지』 13,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2006)
「천은사기실비(天恩寺紀實碑)」(박한영, 192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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