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양산 출신. 고향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12월 임진강·한탄강 유역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허위(許蔿) 휘하에 들어갔다.
1907년 12월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고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남하, 윤정의(尹政儀)와 제휴해 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4월 윤정의 의병부대와 합동으로 울산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고 이어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908년 6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 고향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하서면·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1908년 9월 경상남도 산청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휘하에 들어가 부장이 되었다.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산청 두량곡(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이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어 이학로 부대의 향도관(嚮導官)으로 있다가 1909년 3월 독립해 소모장 이성로(李聖老), 도포장 이춘실(李春實), 파수장 이국선(李局善), 연습장 김재익(金在益) 등의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춘 뒤로는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항전을 벌였다.
부대 편성 직후 합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고, 이어 5월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기도 하였 다. 또한, 7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 800냥을 거두었다.
9월에도 창원 양전의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다. 10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진주 가좌면에서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12월 의령과 고성에서도 일본상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1월 함안군 부곡리의 민가에 무기와 의복을 은닉해 놓고 정탐하기 위해 상인으로 가장하고 김해로 들어왔으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