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호건(浩乾)·문세(文世), 호는 해석(海石).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평양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0년에 선교사로 동삼성에 파견되었을 때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다짐하였다.
1912년 하얼빈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 때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해 4월 10일과 11일 이틀간에 걸쳐 동지 이동녕(李東寧) 등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회의장에서 개최했을 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이동녕을 이어 임시의정원의 의장이 되었다.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이 되었으며, 평안도 대표로 37세 때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 바도 있다. 1922년 10월 28일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같이 발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0년 1월에는 김구·김철(金澈) 등 10여 명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를 발기, 그 회장이 되었다. 1922년 2월 23일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동삼성 길림(吉林)으로 가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