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

손정도
손정도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의용단을 조직해 임시정부를 지원한 독립운동가.
이칭
호건(浩乾), 문세(文世)
해석(海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2년(고종 19)
사망 연도
1931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정의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의용단을 조직해 임시정부를 지원한 독립운동가.
내용

자는 호건(浩乾)·문세(文世), 호는 해석(海石).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평양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0년에 선교사로 동삼성에 파견되었을 때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다짐하였다.

1912년 하얼빈에서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 때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해 4월 10일과 11일 이틀간에 걸쳐 동지 이동녕(李東寧) 등 30여 명과 같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를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회의장에서 개최했을 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이동녕을 이어 임시의정원의 의장이 되었다.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이 되었으며, 평안도 대표로 37세 때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 바도 있다. 1922년 10월 28일 결성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같이 발기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0년 1월에는 김구·김철(金澈) 등 10여 명과 같이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를 발기, 그 회장이 되었다. 1922년 2월 23일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동삼성 길림(吉林)으로 가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임정과 이동녕연구』(이현희, 일주각, 1989)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자료집』 7·8·9·10·11·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4·1983)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독립신문(獨立新聞)』
『동아일보(東亞日報)』
『朝鮮獨立運動』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 編, 東文社書店,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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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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