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하승(夏承), 호는 서계(西溪). 아버지는 송형태(宋亨泰)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김학창(金學昌)의 딸이다. 조원승(趙元升)의 문인이다.
1762년(영조 38) 증광시(增廣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771년 승문원의 저작을 거쳐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을 역임하였으며, 이듬 해 성균관전적을 지낸 뒤 직강(直講)으로 있으면서 어제시(御製詩)를 반하(頒下)하였다.
병조좌랑에 재직할 때 병영(兵營)에서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너무 과중히 책정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상사에게 보고하여 세리의 횡포를 막는 방안을 모색하고 책정된 군포의 분량을 격감시킴으로써 민생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때는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실록을 보관하는 일에 공로가 있었다. 1789년(정조 13) 이후로 충청도도사·사헌부감찰·삼례찰방(參禮察訪)을 역임하였다. 1791년 63세 되던 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과 고을의 폐단과 악습을 개혁하는 데 매진하였다. 저서로는 『서계유집(西溪遺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