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 1919년 5월 사재 1,300원을 들여 독립운동가의 연락을 위한 비밀장소로 대구시내에 가옥을 매입해 동료 최해규(崔海奎)를 거주시켜 연락사무를 맡겼다.
그리고 무기와 선전문서 등의 입수방편으로 신의주에도 가옥을 구입해 생질 정욱(挺郁)에게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하게 하였다. 1920년 고향 달성군에서 동지 수십명과 같이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 조직체를 구심점으로 하여 농민 2,300여 명을 규합해 복지활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이 잘 살아야 독립운동도 원활히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농민의 조직화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단일정부로 통합된 뒤, 군자금 모금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요원의 위촉을 받았다.
경상북도 일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중 경상남도 의령군 일본경찰 사살사건의 주모자 혐의를 받고 그 해 12월 하순경 남마산(南馬山)에서 붙잡혔다. 1921년 3월 가석방되었지만, 그 해 4월 초순에 다시 잡혀 신의주지방법원지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평양과 서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2년 8월 가석방되어 다시 군자금 모금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경상북도 제2사건 주모자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구형받았으나, 신의주사건과의 일사부재리원칙이 적용되어 무기소지 등 다른 죄목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11월에는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병로(金炳魯)를 선출하고, 중앙위원 전체 40명 중의 1명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