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늑천.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며,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사화를 피하여 낙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옥천·도곡(塗谷)·송촌(宋村) 등지로 옮겨다니며 살았다.
뒤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충청도도사·지평·장령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 특별히 서연관(書筵官)을 제수하여 별유(別諭)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755년 옥과현감(玉果縣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 집의·승지·참의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모두 글을 올려 거절하였다. 만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되면서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연관이 되어 정치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여 파직되었다.
송명흠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이재·민우수(閔遇洙)·송사능(宋士能)·김양행(金亮行)·신소(申韶) 등과 서신으로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저서로는 『늑천집(櫟泉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