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성보(誠甫), 호는 세한재(歲寒齋). 아버지는 증영의정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봉사(奉事)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조선 후기의 거유 송시열(宋時烈)의 아우로서 김장생(金長生)을 사사하였다.
1659년(효종 10) 향천(鄕薦)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그 뒤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영산현감(靈山縣監)을 역임하고, 뒤에 의금부도사로 재직하다가, 1664년(현종 5) 지방으로 내려가 청안현감(淸安縣監)으로 근무하였다.
곧이어 사헌부감찰을 거쳐 익산군수로 재직하던 중 해마다 흉년이 들어 고을 주민들이 생업에 안주하지 못하자, 진구정책(賑救政策)을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1672년 장성부사로 재직시에는 필암서원(筆巖書院) 등을 세워 학자를 초빙하여 사민(士民)을 교육시킴으로써 문풍을 진작시켰다.
1674년 형 송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따라가 시중을 들면서, 이때부터 송시도가 죽을 때까지 당시 치열하였던 당쟁의 전말, 이에 대한 조정의 처리과정, 형 송시열이 여러 차례 유배된 배경 등을 일기형식으로 저술하기도 하였다.
한편, 1680년(숙종 6) 정변으로 노론이 집권하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군자감정(軍資監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충청도 보은의 금적산(金積山) 아래에 일경재(一敬齋)를 지어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 뒤 1689년 다시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따라갔다가 그 곳에서 풍토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세한재유고(歲寒齋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