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33세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서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격 후 정언 · 장령 · 현감 등을 역임한 다음 1769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한 뒤 일단 고향에 돌아갔다.
그러나 곧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월 6일부터 8월 14일까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의 감수를 맡았다.
이후 승지 · 북청부사 · 순천부사 ·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년(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업적은 여러 문헌에 다음과 같은 논제(論題)나 책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운해훈민정음』(행장에는 五聲韻解) · 『일본증운(日本證韻)』 · 『언서음해(諺書音解)』(유고목록과 서에는 東音解) · 『평측운호거(平仄韻互擧)』 · 『거제책(車制策)』 · 『병선책(兵船策)』 · 『수차도설(水車圖說)』 · 『논선거비어(論船車備禦)』 · 『의표도(儀表圖)』 · 『부앙도(頫仰圖)』 · 『소사문답(素沙問答)』 · 『직서(稷書)』 · 『장자변해(莊子辨解)』 · 『강계지(疆界志)』(또는 疆界考) · 『산수경(山水經)』 · 『도로고(道路考)』 · 『산수위(山水緯)』(旅菴全書에는 山水考로 통합되어 있음.) · 『사연고(四沿考)』 · 『가람고 伽藍考』 · 『군현지제(郡縣之制)』 등이다.
이상에서 그가 문자학(文字學) · 성운학(聲韻學) · 지리학(地理學)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운해훈민정음』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성음도(皇極經世聲音圖)』(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韻圖)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