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화오(華五). 심수간(沈壽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유의(沈游義)이고, 아버지는 심집(沈檝)이며, 어머니는 윤석중(尹錫中)의 딸이다. 용인 출신이다.
1782년(정조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97년 집의 이명연(李明淵)의 상소로 조정이 시끄러울 때에 교리로서 부교리 이기양(李基讓)·박윤수(朴崙壽)와 함께 이명연에게 제직(除職)한 명을 거두라고 연명소(聯名疏)를 올렸다가 파직되고 강외(江外)로 출송(黜送)당하였다.
1799년 교리로서 천주교 사건으로 관직을 추탈당한 죄인 채제공(蔡濟恭)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가 수찬 박길원(朴吉源)과 격심한 논쟁을 벌여 박길원과 함께 파직되었다. 1800년(정조 24) 사간으로 임명되어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온릉(溫陵)에 비를 세웠다.
1802년(순조 2) 윤덕준(尹德駿)의 시호(諡號)를 정하는 논의가 일어났을 때, 정언 강시환(姜時煥)으로부터 전날의 채제공 신원 문제로 다시 탄핵을 받았다.1806년 승지로 있을 때에 다시 채제공의 신원을 위하여 소를 올렸다가 이를 비난하는 승지 이조원(李肇源)·민기현(閔耆顯)·유경(柳畊) 등과 함께 파직불서(罷職不敍: 관직을 파하고 등용하지 않음)의 처벌을 받았다. 이름난 효자로서 죽은 뒤 1828년에 정려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