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안관오(安冠五). 호는 석천(石泉). 황해도 신천 출신.
1918년 종형 안중근(安重根)이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박은식(朴殷植)·안정근(安定根)·신채호(申采浩)·이범윤(李範允) 등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혁명 러시아의 과도기적 혼란으로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해 경무국장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진력하였다.
1923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쓰촨군관학교[四川軍官學校]에 입학하여 이준식(李俊植)·문일민(文一民) 등과 같이 졸업하였다. 1925년 윈난사관학교[雲南士官學校] 졸업 후에도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권회복 문제를 협의하였다.
동삼성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3부 통합운동에 민족통합적 차원에서 합작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자 다시 상해로 갔다.
1930년 상해로 돌아온 뒤 김구·이동녕(李東寧)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협의해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구대장(區隊長)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투탄 의거에 힘입어 중국 국민당정부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로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분교가 개교하였다. 여기서 안경근은 직접 학생들을 훈련했으며, 난징[南京] 등지에서 군관생도 모집에도 주력하였다.
1934년에는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김구와의 연락 책임을 맡아 한·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한 시가 일원에 일제 밀정들의 발호가 극심하자 김구·정화암(鄭華巖) 등과 함께 밀정 소탕에 공을 세웠다.
1940년대 충칭[重慶] 시절에는 김구 주석을 보좌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겸하면서 조국광복에 진력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