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길포(吉浦), 호는 순풍정(順風亭). 현감 오하몽(吳下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천부사 오응정(吳應鼎)이며, 아버지는 도총부도사 오직(吳稷)이다.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어떠한 사람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찍이 문명이 높아 고을의 천거로 사재감(司宰監)의 참봉을 거쳐, 예문관대교(弘文館待敎)를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봉사로 재직시 능창대군모역사건(綾昌大君謀逆事件)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성균관의 박사·전적(典籍) 등 요직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최명길(崔鳴吉)의 강화론이 유력하여 강화가 이루어지자 이를 반대하여, 학사 윤집(尹集)에게 “나라의 원수도 갚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원수조차 갚지 못하였는데 어찌 오랑캐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는가”하고는 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군졸을 시켜 시신을 찾아내어 고향땅에 안장하게 하였다. 부인 정씨(鄭氏)도 남편의 시신을 건져 장례를 치른 뒤 목숨을 끊었다. 나라에서는 정려의 은전을 내려 부부의 충렬을 포상하였다. 금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고,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