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오윤길(吳允吉). 경기도 고양 출신. 이동휘(李東輝)의 사위이다.
대한제국 당시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12월 이동휘와 함께 길림성 동녕현(吉林省東寧縣) 나자구(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경기도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다가 1921년 2월 면직되었다. 1923년 10월 상해 거주 한인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의 의원으로서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이 해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조직되어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할 때 위원으로 임명되어 기초위원회 규정을 작성하였다. 1924년 1월부터 12월까지 상해교민단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박은식(朴殷植)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집무하고 있을 당시 국무위원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부터 11월에 이르는 동안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항일독립 운동단체의 분규를 수습·조정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의 총재인 손정도(孫貞道)가 2년 동안 간도에 있을 때는 총재 직무대행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안창호(安昌浩)의 주장으로 조직된 임정경제후원회발기준비위원회(臨政經濟後援會發起準備委員會)에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촉진회(獨立運動促進會)를 조직해 안공근(安恭根)회장과 함께 한국민족의 광복을 촉구하면서 대동단결을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약헌(臨時約憲)이 공포되어 개각된 김구(金九)국무령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8월 이동녕(李東寧)이 수석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외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4월 국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9월 사임하였다. 1931년 11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와병으로 인해 결원 처리된 뒤 1939년 3월 10일 상해에서 죽었다. 유족은 중국에 귀화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