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오희선(吳羲善). 경기도 용인 출신.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上海)로 망명, 독립운동의 거점을 물색하였다.
그 해 4월 13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경기도 대표 신석우(申錫雨) 등 4명과 같이 초대의원이 되었다. 또한, 청원법률심사위원회위원과 의정원 세칙제정위원회위원으로 선출되어 입법부의 업무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였다. 같은 해 제5차임시의정원회의에서 각 상임위원회위원장을 선출할 때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재정문제 해결을 위하여 고심하던 중 특히 1919년 5월 제4회회의에서 내외 공채(公債)의 발부, 의연금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주요 재원으로 확보, 운영하게 하자는 의사를 개진하였다.
1923년 의열단(義烈團)에 관계, 경상남도 일본경찰 사살에도 가담하였다. 1929년 10월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