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석 ()

오천석
오천석
인물
해방 이후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 『민족중흥과 교육』 등을 저술한 교육자.
이칭
천원(天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87년
본관
해주(海州)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정의
해방 이후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 『민족중흥과 교육』 등을 저술한 교육자.
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천원(天園). 평안남도 강서 출생. 목사 오기선(吳基善)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 소년기에 우리 나라가 일본에 침탈당하는 비운을 체험하면서 조국애를 키우고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에 힘썼다. 1919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코넬대학(1925)·노스웨스턴대학(1927)·콜럼비아대학(1931)에서 교육학으로 학사·석사·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부터 4년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강연·논문 등으로 한국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상해로 피신하였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교육활동을 재개, 미군정청 문교부 차장·부장(1945∼1948)을 역임하면서 일제에 빼앗겼던 한국교육을 민주주의 초석 위에 재정립하는 일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특히 교육계 원로들로 구성된 교육위원회를 조직하여 홍익인간의 교육목적 설정, 6·3·3·4제의 기간학제 제정, 국립서울대학교 창설 등을 주도하였고, 민주주의와 아동존중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새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이후 대한교육연합회장(1950), 한국교육학회장(1955∼1960),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1955∼1960)을 역임하였고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정권 때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이때 교육대학 신설, 향토학교운동, 교과서 개편 등을 통하여 교육민주화를 추진하다 5·16군사정변 발발 1개월 전에 퇴임하였다.

이 후 주멕시코대사(1964∼1967), 학술원 회원(1977∼1987), 경희대학교·상명여자대학교·덕성여자대학교 이사를 역임하였고, 청주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민족중흥과 교육』·『발전한국의 교육이념』·『스승』 등 다수가 있으며, 『오천석 교육사상문집』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그 중 『스승』은 15만 부가 매진되는 초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1987년 “나는 내 조국의 민주교육을 위하여 살고 일하다 가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작고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한국초유의 교육인장으로 거행되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천원약전』(1988)
「외로운 성주」(『오천석교육사상문집』10, 1975)
관련 미디어 (1)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