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정월대보름날 행해졌다. 무안은 밀양역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조선조 때는 역참(驛站)이 있던 곳으로 수안역리(水安驛里)라고도 한다. 수안이란 우리말 ‘물안[水內]’의 이두문자식 표기로서, 무안은 ‘물안’의 물에서 ‘ㄹ’이 탈락된 것이다.
무안마을 뒤쪽에는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의 산등성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서 동부를 용마을[龍村], 서부를 범마을[虎村]로 일컬어왔으며, 수백 년 전부터 정월대보름날을 전후하여 3일 동안은 이 마을의 안녕과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용호놀이가 거행되었다.
정월 초이렛날쯤 되면 행사준비위원들이 고을의 동·서 양편 각 가정으로부터 짚을 거두어 두 가닥 또는 세 가닥씩 꼬아 지름 약 2자의 큰 줄을 만드는데 동부를 수놈의 용(龍)으로, 서부를 암놈의 범[虎]으로 만든다. 이 놀이는 중일전쟁이 나던 해(1937)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뒤 중단되었다가 1970년에 다시 부활되어 매년 밀양아랑제(密陽阿娘祭) 때 연희되고 있다.
이 놀이가 있기 전날인 정월 14일 동부 용촌에서는 범의 먹이가 되는 금양(金羊, 假裝)을, 서부 범촌에서는 용이 탐내는 여의주(如意珠, 假裝)를 각기 가운데에 두고, 이를 호위하는 오방신장(五方神將)과 사대부(士大夫)의 양반과 할미·영감 등 일단이 각기 악기를 울리면서 가장행렬과 춤으로 제각기 자기편 마을을 한바퀴 돈다.
이 때는 비교적 부유한 집에 차례로 들어가서 ‘지신밟기’로 악귀를 진압하여 그 집의 연중무사를 빌어준다. 집주인은 사례로 약간의 곡물·금전과 주식(酒食)을 내어놓는다.
다음날인 보름날 아침에는 일단의 농악대가 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상대편 마을을 돌아다닌다. 이 때는 놀림말로 마을사람들을 놀려대고 나서 각기 놀이터로 정해진 자기 진지로 돌아와 기세를 올린다.
각 편에서는 나발과 농악을 울려 군중의 전의(戰意)를 돋우며, 용과 범을 떠받드는 장정들이 천병만마(천군만마)와 같이 동과 서로 대진하여 열(列)을 정돈한다. 진두(陣頭)인 줄 머리 위에는 각기 대장이 용과 범의 영기(令旗)를 붙잡고 올라탄다. 이 때 금양은 용의 머리에, 여의주는 범의 머리에 함께 올라탄다. 이렇게 하여 농악과 춤이 시작되다가 고천의식(告天儀式)을 행한다.
양편의 용과 범은 벌떡 일어나 꿈틀거리면서 농악과 춤과 앞소리[先唱]에 맞추어 서너 번 머리를 굽혀 하늘에 큰절을 한다. 여의주와 금양은 서로 깃대를 휘두르며 상대편의 전의를 돋운다. 양편의 큰절이 끝나면 농악과 춤은 고조되고 심판관의 지시에 따라 용과 범은 가락에 맞추어 서로 춤을 추면서 빙빙 어울려 돈다.
이 때 서쪽 줄머리에는 ‘戰必勝 西部白虎(전필승 서부백호)’라고 쓴 기가, 동쪽 줄 머리에는 ‘戰必勝 東部靑龍(전필승 동부청룡)’이라 쓴 기가 펄럭인다.
용과 범은 서로 어울려 다투게 되고, 이때 기회를 보아 여의주는 용의 머리로, 금양은 범의 머리로 옮겨 공격대원이 되어 대장이 지키고 있는 깃대를 서로 빼앗는 싸움을 벌인다.
이 때 깃대를 먼저 빼앗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편이 이긴다. 승부가 끝나면 이긴 편을 선두로 양편이 다 줄을 메고 농악에 맞추어 한바탕 논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여의주와 금양이 대장기(大將旗)를 빼앗는 것이 아니고, 양쪽 줄 머리가 맞부딪쳐서 싸울 때 농기(農旗)를 빼앗았다고도 한다.
이 놀이에서 흥미 있는 점은 오랜 옛날부터 이 고을에서는 각 편의 대장이 되는 사람은 일생의 명예로서 대장의 역을 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기부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때가 되면 서로 대장을 하려고 입후보하는데, 대장이 된 사람은 대장복장을 하고 대장기를 가지고 각 부를 대표하여 줄 머리 위에 타게 되며, 이 놀이가 끝난 뒤에도 그 대장기를 농 밑에 잘 간수하여 두었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