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목천(木州)이다. 우복야(右僕射) 우방재(于邦宰)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남달랐고 기개가 있어 의종·명종 양조에 숙위(宿衛)하였는데, 오직 충성과 근실로써 임무를 다하였다.
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도모하면서 군사를 맡을 자를 의논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지금 우공(于公)을 두고 다시 어떤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우학유의 집에 가서 일을 의논하자, 우학유는 말하기를 “공(公)의 뜻은 장하나 나의 아버지가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굴한 지 오래이라 어찌 분하지 않겠으며 그들을 제거함은 썩은 것을 부러뜨림과 같이 쉬운 일이기는 하나, 문관이 해를 당하면 화가 우리들에게 돌아올 것이 너무나 명백하니 너는 이를 삼가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나의 아버지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말씀은 아직 귀에 남아 있으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좇지 못 하겠소.”라고 하였다.
뒤에 이고와 이의방이 뜻을 이루어 해치려고 하자 두려운 나머지 이의방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화를 면하였다. 1172년(명종 2)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이 때 성주(成州: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 사람이 삼등현(三登縣: 지금의 평안남도 강동)을 없애려고 하여 그에 좇지 않는 자를 죽여 수십명에 달하였고, 또 철주(鐵州: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 사람은 그 수령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서로 다투어 죽는 등 서북면이 자못 소란하였으나, 능히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1179년에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러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