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 12점, 소조불두(塑造佛頭) 18점, 동경(銅鏡) 2점. 총 32점. 1987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이 유물들은 1980년 원효사 대웅전의 신축공사 중 청동불상 등이 출토되자 국립박물관이 긴급 발굴한 유물이다.
그 중 높이 10.5cm의 청동불입상은 원효사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통일신라의 작품이다. 높다란 육계(肉髻)와 살이 오른 둥근 원만한 얼굴에는 미소가 역력하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가슴 아래까지 흘러내리다 배 앞에서 다시 Y자형으로 갈라져 있다.
왼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오른손을 밑으로 내린 통인(通印)으로서 이 손목을 감싸고 흘러내린 의습이 발목 위로 연결되었다. 대체로 8세기의 이른 시기쯤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나머지 5점의 청동불입상은 이보다 시대가 뒤늦은 고려 초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완전한 형태의 불상 1점은 앞서와 같이 통견의 법의와 배 앞에서 Y자형으로 갈라진 의습을 지닌 작품이지만 사각형의 침울한 얼굴, 도식적인 의습의 처리 및 신체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묘사되면서도 어색해진 통인의 손모습 등 시기적으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다른 3점의 불상 역시 같은 형식이지만 마모가 심해 세부를 분명히 파악할 수 없으며 1점은 목 윗부분이 결실되었다. 또 다른 1점의 불상은 통견의 법의가 목 앞에서 접혀져 U자형을 이루며 흘러내린 모습으로서 통인의 손끝과 다리 이하가 절단되었으나,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불(藥師佛)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2점은 보살상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머리에 보관을 쓰고 합장한 모습의 보살상은 가슴 앞에 X자형으로 갈라진 영락 장식이 하부까지 장식되었고 짧은 두 다리 아래로 반원형의 대좌가 표현되었다.
사각형의 경직된 얼굴과 각주(角柱) 같은 가냘픈 신체 등 고려시대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밖에 형태는 분명치 않지만 지물(持物)을 잡고 있는 듯한 깎은 머리의 입상도 1점 확인된다.
금동불상은 2점이 발견되었는데, 6∼8cm 정도의 매우 작은 크기이다. 그 중 1점은 통견의 법의(法衣)가 배 앞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통인을 지닌 앞서의 청동불입상과 같은 양식이지만 2단으로 된 연화문 대좌를 일주(一鑄)로 통주물하였다. 대좌에는 소략한 단판(單瓣)의 연판문을 시문하였다.
이보다 작은 다른 1점의 금동불입상 역시 대좌까지를 1주로 통주물하였으나 얼굴 옆에 길게 늘어진 보발(寶髮) 같은 장식이 어깨 위에까지 닿아 있음이 독특하다. 대좌는 상 · 중 · 하단의 3단으로 만들어 상 · 하단에 각각 앙 · 복련(仰覆蓮)을 장식하였다. 신체는 평판적이면서 간략한 선각(線刻)으로 의습을 묘사하였다.
청동불두는 높이 22cm로서, 비록 목 아랫부분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형태로 보아도 상당한 크기의 수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굵은 나발로 표현된 머리 정상에는 높다란 육계와 중앙계주(中央髻珠)가 묘사되었고, 둥근 상호(相好)에는 커다란 백호공(白豪孔)과 끝이 살짝 올라간 반쯤 뜬 눈, 그리고 미소를 띤 입술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길게 늘어진 두 귀는 귓밥 부분을 뚫어 놓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100여 점이 넘게 발견된 소조불은 그 가운데 18점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서로 조각수법이 비슷한데, 대체로 5가지의 유형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머리에는 나발(螺髮)과 팽이 같은 육계가 표현되었고 귀는 길게 늘어져 내부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갸름한 얼굴에는 반쯤 뜬 눈과 오므린 듯 작은 입술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온화한 표정이 잘 살아나 있다. 또한 이와 분리된 채 발견된 신체 부분은 대체로 결가부좌(結跏趺坐)에 두 손을 배 앞에 모아 깍지낀 선정인(禪定印)이 주류를 이루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를 복원해 본 결과, 대략 총 높이 30cm 내외의 불상들로서 원래 원효사의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되었던 천불 중의 일부였다고 생각되며 청동불두와 거의 동일한 고려 초기의 제작으로 여겨진다.
동경은 2점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원형경(圓形鏡)이다. 그중 1점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쌍룡문 거울로서 배면(背面)의 외연을 도드라지게 직립시켰고, 중앙의 유(鈕)를 중심으로 2줄의 동심원으로 둘러 3구 구획하였다.
내구(內區)는 유 주위에 연판문을 장식한 원권(圓圈)으로 두르고, 그 바깥에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쌍룡을 부조하였으며 폭이 좁은 외구(外區)에는 운문을 둥글게 배치하였다.
다른 1점의 동경은 외연을 직립시키고 중앙에는 작은 유가 돌출되어 있으나 동심원이나 아무런 문양이 장식되지 않은 단순한 형태이다.
이 밖에도 원효사에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는 와전류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통일신라의 수막새기와가 11점, 암막새기와편이 6점 발견되었고, 기년은 없으나 ‘元曉寺(원효사), □造人明一(□조인명일), 表春節造元緣(표춘절조원연)’ 등의 명문을 지닌 평와(平瓦)도 10여 점 수합되었다.
이상 출토된 유물에서 볼 수 있듯이 원효사는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 여러 번의 중수를 거치며 꾸준히 그 사세를 유지하여 왔다는 점과 특히 고려초기에 천불전(千佛殿)을 건립하여 천불소상(千佛塑像)을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