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온(汝溫). 아버지는 현감 유회(柳淮)이며, 어머니는 사평(司評) 박염(朴恬)의 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종형 유형(柳珩)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했으나 체격이 왜소하여, 1609년에야 이항복(李恒福)의 인정을 받아 훈련도감 초관(哨官)에 임명되었다. 1611년(광해군 3) 6품관에 승진되어 이성현감(利城縣監)이 되고, 뒤이어 이산군수(理山郡守)로 승진하였다. 1618년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이듬해 가선대부로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어 해주성을 쌓는 등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장흥부사·남양부사를 거쳐 1626년(인조 4) 광주목사(廣州牧使)로 남한산성을 쌓는 등 공이 컸다. 1630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재임 중에는 수군을 이끌고 평안도 가도(椵島)에서 일어난 유흥치(劉興治) 등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였다. 영변부사를 거쳐, 1634년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국방을 강화하고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 뒤 오위도총부의 부총관·포도대장·경상좌병사 등의 내외 요직을 거쳐, 1636년 다시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성지 보수, 총포 제조, 군량미 비축, 군사 훈련 등에 힘썼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 홍명구(洪命耉)와 함께 적병을 추격하면서 항전하였다.
이듬해 1월에 청군을 김화에서 무찌르고 춘천에 이르렀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다. 다시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해 공수 대책에 전념하였다. 1641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병사를 요청해오자 왕명을 받아 금주(錦州)로 출정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와의 지난날의 의리를 생각해 참전을 회피하고, 소극적으로 싸워 청나라의 문책을 받았다.
그 뒤 지중추부사·통제사 등을 지냈으며, 좌의정에 증직되고 김화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