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초명은 유원규(庾元規), 자는 빈왕(賓王)이다. 아버지는 판이부사(判吏部事) 유필(庾弼)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하였다고 한다. 글을 잘 지었으나 두번이나 과거에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이 되고, 1151년(의종 5) 내시가 된 뒤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 금오위녹사,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등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지방관으로 남경(南京)에 나가 청렴하고 정사를 잘 하여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가, 뒤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 등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자, 내시로 기용되었다가 공부낭중(工部郎中)이 되어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선위(禪位)의 사실을 알리고 돌아와 그 공으로 군기감 겸 태자중사인(太子中舍人)이 되었다. 금나라에 가서 보여준 고매한 인격은 뒤에 금나라의 사신들로 하여금 모두 반드시 안부를 묻게 하였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다가 잡혀 죽었다. 이 때, “모든 문신과 함께 도모하였다.”라고 무고함으로써 화를 입을 뻔하였으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무사하였다.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을 때, 왕명으로 서경의 여러 성(城)을 선유(宣諭)하며 점차로 귀순하게 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郎)이 되었다.
1175년(명종 5) 정월 전중감으로서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와 함께 왕명으로 서경에 가서 조위총을 군신의 대의로 설유하여 그로 하여금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위총이 곧 배반하여 귀로에서 죽이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여 화를 면하였다. 같은 해 9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