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

유인석초상 / 조규환
유인석초상 / 조규환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창의군에서 도총재로 활동하며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한 의병장.
이칭
여성(汝聖)
의암(毅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2년(헌종 8)
사망 연도
1915년
본관
고흥(高興)
출생지
강원도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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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창의군에서 도총재로 활동하며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강원도 춘천 출신. 아버지는 유중곤(柳重坤)으로 14세 때 족숙인 유중선(柳重善)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비교적 건실한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주로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로부터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尊華壤夷思想)을 철저히 익혔다.

1865년 만동묘철폐(萬東廟撤廢)와 1868년 병인양요로 대내외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갈 무렵에 이미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때에는 이러한 존화양이사상을 기반으로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경기도 유생 46인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항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891년에 김평묵이, 1893년에는 유중교가 죽자, 이항로-김평묵-유중교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승계하게 되어 학파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제천의 장담(長潭)에서 강학하던 유중교의 기반을 계승하기 위해 1895년 6월에는 그 곳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그곳에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등의 문인사우들과 함께 ‘복수보형(復讐保形: 抗日守舊)’의 기치를 들고 1895년 12월 24일(음력)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친일적인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土倭)’들을 처단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선유사 장기렴(張基濂)이 지휘하는 관군의 공격으로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상실하였다.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재기 항쟁을 도모하기 위해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하였다. 그렇지만 양서지역에서의 재기 항쟁도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다. 그곳에서 도리어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어, 같은해 7월 28일 혼강(渾江)에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의병해산 후에는 한인(韓人)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하였다. 1897년 3월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하였으나 곧 이 곳으로 재차 망명하였다. 1898년 10월에는 부근의 팔왕동(八王洞)으로 이주하여 여러 성현의 영정을 봉사(奉祠)하는 성묘(聖廟)를 세우기도 하였다. 한인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피하여 귀국한 뒤로는 양서지역 각지를 돌며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주력하여 이진룡(李鎭龍)·백삼규(白三圭)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정미칠조약체결을 계기로 국내활동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 연해주 망명을 결심하였다. 1908년 7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곳에서 이상설(李相卨)·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결성을 보게 되었으며, 이상설·이범윤·이남기(李南基) 등에 의하여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이 직위는 1895년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집요하게 전개해온 항일투쟁의 공훈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로 유인석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에 해당한다.

유인석은 이때 「통고13도대소동포(通告十三道大小同胞)」라는 포고문을 반포,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개시하기도 전인 1910년 8월에 ‘경술국치’로 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더욱이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이곳의 항일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하자 13도의군은 와해되는 도정을 밟았다.

이에 무력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모든 지사(志士)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하여야 한다.”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자신도 연해주를 떠나 1914년 3월 서간도의 봉천성 서풍현(奉天省西豊縣)에 정착하는 제3차 망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관전현 방취구(寬甸縣芳翠溝)로 옮겨 그 곳에서 죽었다.

이와 같이, 유인석은 일관하여 ‘위정척사’·‘존화양이’ 정신에 입각, 철저하게 수구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적극 항일하였고,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발전시켰다.

이항로가 개항 이전에 관념적 위정척사론을 펼쳤던 데 비해, 개항 이후에 현실적 위정척사론을 전개시켰기 때문에 의병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1902년 문인들에 의하여 간행된 『소의신편(昭義新編)』에 결집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의암집(毅菴集)』
『소의신편(昭義新編)』
『이상설전』(윤병석, 일조각, 1984)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박민영, 『청계사학』3, 1986)
「의병장 유인석의 의병운동고」(이동우, 『성대사림』2, 1977)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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