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당진 출생. 합덕보통학교와 예산농업학교를 수료한 뒤 1935년 중국 봉천(奉天)과 상해를 거쳐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였다.
1936년 김원봉(金元鳳) 일파 주도 하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입당했다가 항저우[杭州]로 가서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였다.
1937년 광둥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 입학했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재건을 위해 다시 난징에 와서 한국독립당에 복귀, 항저우 잔류인원의 후송 책임을 수행하였다.
1937년 중국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15기 제1총대 포병대대 제2대에 배속되어 중국학생과 함께 창사[長沙]·한커우[漢口]·충칭[重慶]·비산[畢山]·청두[成都]로 이동한 뒤 훈련을 받고 청두에서 졸업하였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독립당의 명령에 따라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 1940년 2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전속 부관직에 임명되어 광복군 창설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때 중국전방 장사위로부녀회(中國前方將士慰勞婦女會) 회장 쑹메이링[宋美齡]을 방문해 한국광복군 창설 축하찬조금 10만원을 받아 광복군총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40년 후반 시안[西安]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특파단의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 10여 명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장 나월환(羅月煥)외 50여명과 합류해 활동하였다.
1941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개편되자 광복군 전방사령부 소속으로서 파견근무하게 되었다. 중국군 중위계급으로 제3구대장직을 맡아 간사단한청반(幹四團韓靑班) 제1기생을 훈련시켜 졸업시키고 원대복귀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간부로 배속되어 지대장 고운기(高雲起)·지달수(池達洙) 등 간부들과 함께 신편요원(新編要員)이 되어 쑤이위안성[綏遠省] 산바[陝複:傅作儀의 중국 제8전구사령부 소재지]로 가서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최전방 중국 각 부대를 순방하고, 적후공작 거점이 될 마잔산[馬占山]부대가 있던 신민바오[新民堡]근처의 현(縣) 정부 소재지로 이동하였다. 유해준은 현정부 내에 배속되어 일본의 점령지구인 쑤이위안성 바오터우[包頭]에 잠입하기로 하고 중국 위군(僞軍)에 가입대(假入隊)하였다.
10여 일 뒤 위군복장으로 일군 초병의 검문을 뚫고 통과하였다. 그러나 현지에서 포섭했던 최준(崔俊)이가 일본 헌병대에 자수함으로써, 유해준은 징모분처의 간부들과 일본헌병들에 붙잡혀 일본 구주(九州)로 이송되었다. 오구라[小倉]재판소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