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출생. 호는 절산(節山). 1936년 『동아일보』에 「문학인과 생활의식」을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 「지성문제와 휴우머니즘」등의 평문을 통해 1930년대 후반기 문학의 커다란 비평적 쟁점이었던 휴머니즘논쟁에 참여하면서 비평가로서 위치를 확립하였다.
광복 후 임화(林和) 중심의 조선문학건설본부에 대항하여 이기영(李箕永) · 한설야(韓雪野) · 권환(權煥)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였다. 당의 지령으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합쳐지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월북하였다.
1930년대 중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해체 이후 윤규섭이 발표한 비평은 대개 당대 문단의 관심사와 연결되어 있다. 「휴맨이즘론」(『비판』, 1937.7) · 「문학방위론」(『조선일보』, 1937.7.22∼25) · 「문학의 재인식」(『동아일보』, 1937.11.9∼13) · 「주체의 재건문제와 현실적 생활」(『동아일보』, 1937.12.21∼28) · 「삼십년대 인테리겐챠의 영상」(『비판』, 1938.3) · 「작가의 근시성과 작품의 다양성」(『비판』, 1938.5) · 「문학의식과 생활의 괴리」(『조선일보』, 1938.5.18∼25) · 「작가의 정열과 문학의 사상성」(『조선일보』, 1938.8.9∼14) · 「지성문제와 휴매니즘」(『조선일보』, 1938.10.11∼20)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평론에서 윤규섭은 계급문단에서 중시했던 계급성이라는 개념을 개개의 작품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잣대로 사용한다. 윤규섭은 예술과 계급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허구성의 개념을 중시한다. 윤규섭은 당대의 리얼리즘론이 암담한 현실과 세태만을 중시하여 계급성을 중요하지 않은 범주로 취급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문학의 기본적인 특성이 허구성인 만큼 문학의 계급성은 이 허구성을 통하여 얼마든지 관철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윤규섭은 광복 후에도 「해방과 민족반역자」(『예술』, 1945.12) · 「현정세와 문화전선」(『중앙신문』, 1945.12.19∼25) · 「민족문화론」(『신문예』, 1946.7) 등의 평문을 통해 여전히 계급성이라는 미적 범주를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월북 후에는 윤세평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고, 북한의 기본적인 문예정책의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