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에 관계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7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 청년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 모임인 조선청년 연합기성회에서 지방부위원,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서무부 상임위원, 1921년 1월 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 이사,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회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 겸 교무부 상무위원에 각각 선출되었다.
한편, 해외에서는 상해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1월 베르흐녜우딘스크에서 개최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통합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12월, 한국문제에 관한 코민테른의 지도기관인 코르뷰로[高麗局]가 결성되었을 때 상해파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만주로 옮겨 1926년 5월 중국 길림성 위사현(葦沙縣)에서 조선공산당에서 파견된 조봉암(曺奉岩) 및 만주 지역 상해파 지도자인 김하구(金河球)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조직하고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의 해산과 새로운 재건을 지시하자, 1929년 3월 길림성 돈화현(敦和縣)에서 김철수(金錣洙) 등과 함께 서울상해파 당재건운동조직인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 부책임자가 되었다.
1931년 2월 말 함흥에서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산하고 중국공산당 국내공작위원회의 지도를 받기로 결의했을 때 참가하였다.
이후 서울상해파가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를 결성하자 정치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진지방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였다. 1930년 4월 30일부터 시작된 일제의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만주로 탈출하였다.
2004년에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