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은 형림(荊林)·현인(玄人). 1930년대 초반부터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맹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문학파 및 해외문학파와 계급문학운동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였다.
그가 발표한 평문은 「예술의 성립과 그 해체」(조선일보, 1930.11.16.∼30.)·「소설삽화와 삽화제가」(조선일보, 1930.12.12.∼18.)·「예술운동의 전망」(비판, 1932.1.) 등이 있다.
또한 「프로문예운동 작금의 회고와 전망」(시대공론, 1932.1.)·「문단촌침(文壇寸針)」(비판, 1932.1.)·「채만식(蔡萬植)군에-약간의 준비적 질문에 답함」(중앙일보, 1932.2.24.∼3.8.)·「이효석의 사변을 주함」(비판, 1932.3.)·「문예시평」(비판, 1932.3.)·「문단(文壇)SOS-‘혼란 저조의 문단’을 읽고서」(조선일보, 1932.3.13.)·「문단의 위험신호?-‘혼란 저조의 문단’을 희(戱)함」(중앙일보, 1932.3.16.) 등도 발표하였다.
「동반작가문제」(삼천리, 1932.12.)·「문단의 퇴폐와 문예운동의 신전개」(조선일보, 1933.1.10.)·「양주동(梁柱東)씨의 계급적(階級的) 이반(離反)」(조선일보, 1933.1.25.∼26.)·「해외문학파와 그의 기본적 동향」(조선일보, 1933.2.18.)·「예술동맹의 해소를 제의함」(비판, 1934.7.)·「문예비평에 대한 견해의 상대성」(풍림, 1936.12.)·「창작의 방법론에 항하야」(조선일보, 1936.3.10.∼21.)·「문예시평」(조선문학, 1936.5.) 등이 있다.
그는 「예술운동의 전망」을 통해서 계급문예운동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1934년 7월에 카프의 해체를 최초로 제의한 「예술동맹의 해소를 제의함」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카프 조직 내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카프가 극단적 종파주의로, 문예의 활동성을 억압하였으며 이제 카프의 정신 자체의 붕괴마저 초래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직의 재정비를 위해서라도 카프는 해체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주장은 카프의 조직이 붕괴되어 가는 와중에서 대담하게 제기된 것이었다. 1935년 5월 카프가 해산된 이후에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다가,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한 후 월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