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원숙(源叔). 판서 이계남(李季男)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이태석(李泰錫)이다. 어머니는 조수(趙琇)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743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어 1747년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그 뒤 헌납을 역임하고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759년 종성부사로 재직시 치적이 뛰어나다는 북도어사의 보고로 왕으로부터 숙마(熟馬: 커서 길들여진 말)를 하사받았다.
특히, 초산부사로 재임중에는 공미(公米) 재고량을 일정량만 남기고, 주린 백성들에게 분급하여 구휼에 진력하였다. 또한, 외직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읍고개에서 10여 거마가 구관(舊官)이 되는 이광익의 이삿짐을 실어나르러 오자, 보낼 물건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청렴한 목민관이었다.
관찰사 이이장(李彛章)이 임금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이광익은 백성의 소(訴)가 있을 때마다 공평하게 시비를 가렸고, 부정한 수뢰행위는 일절 삼갔으며, 스스로 자기를 규율하여 백성을 위한 선정에 전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