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갑은 감리교 목사로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을 하였으며, 해방 뒤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원서(元瑞), 호는 운호(雲湖)이다.
1887년(고종 25)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李道熙)와 박안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912년 충청남도 공주의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 교장인 여선교사 샤프(Mrs. Sharp)와 이화학당 교장의 중매로 이화학당 출신의 이애라[(李愛羅), 이애일라(李愛日羅), 본명 이심숙(李心淑)]과 결혼하였다. 1921년 이애라와 사별하고, 1925년 김애라(金愛羅)와 재혼하였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아산군 영인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규갑은 1906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충청남도 홍주 의병에서 운량관(運糧官)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경 영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감으로 근무하였으며, 1917년 공주에 여자야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평양기독병원과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평양지역 대표로 상경하여 3·1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 홍진(洪震) 등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민회의 중앙대표로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4월 23일 한성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달 상해로 망명한 이규갑은 상해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한인청년회와 대한청년단 등에 가담하여 간접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5월 이후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대한적십자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중국 흑룡강성의 삼일학교(三一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며 애국청년혈성단(愛國靑年血誠團)을 조직하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미국남감리회 소속 목회자로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27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1929년 4월 신간회(新幹會) 경동지회(京東支會) 설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1928~1931년 돈암교회·월곡교회·우이동교회·창동교회, 1933년 광희문교회, 1935년 의정부교회 등에 부임하였고, 1938년 일제에 검속되었다고도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감리교회 재건운동을 선도하였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최고위원과 문교사회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순국선열유가족 조사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1963년 민주공화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