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질(士質). 할아버지는 옥천군수 이주신(李舟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이천보(李天補)이며, 어머니는 송상유(宋相維)의 딸이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해 음보로 휘령전참봉(徽寧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77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리·승지를 지냈으며, 1779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동래부사·경상감사에 승진하였다. 1781년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간·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1784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786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을 때 왕세자가 죽으니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 해 여주목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부사직(副司直)·지경연사(知經筵事)·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을 역임하다가 11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잘못 천거해 추고(推考: 심문해 징계함)되었다.
이듬해 1월 벽파로부터 홍봉한(洪鳳漢)과 관계를 맺던 한덕후(韓德厚)를 대직(臺職)에 천거했다는 비난을 받자, 빈청(賓廳)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퇴궐해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가 석달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1789년 인척인 오재순(吳載純)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兩銓)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 뒤 판의금부사를 거쳐 1790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 2년간 재직하다가 돌아와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792년 이조판서로 있던 중 채제공(蔡濟恭)을 심하게 논척하는 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났다.
그 뒤 곧 형조판서에 다시 서용되어 병조판서·판의금부사·예조판서 등을 지내다가, 1793년 이조판서로 있던 중 수찬 최헌중(崔獻重)의 탄핵을 받고 사직소를 올려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되었으며, 지경연사·부사직·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