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양백(養伯), 호는 귀휴당(歸休堂). 이세성(李世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윤탕(李允宕)이다. 아버지는 참판 이염(李琰)이며, 어머니는 감사 최개국(崔蓋國)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가 평안도평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벼슬을 단념, 고향에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정언이 되어 훈신의 비위사실을 탄핵하였고, 이어 곡산군수·광산현감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종묘령(宗廟令)으로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도(江都)에 호종하였다.
그 뒤 사복시정·장악원정·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1635년 충청도토포사(忠淸道討捕使)로 나가 도적들을 소탕하여 그 공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1636년 비변사의 추천으로 황해도감사에 특진되어 비어대책(備禦對策)에 진력하였고, 특히 해주·재령에 산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여 병자호란 때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듬해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어 청 태종이 돌아갈 때에 조정에서 이배원에게 대접을 잘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진감사(眞監司)가 가황제(假皇帝)에게 대접할 수 있겠는가.” 하고 청진(淸陣)에 대한 접대를 소홀히 하여 파면당하였다. 뒤에 다시 서용되어 형조·공조의 참의 등을 지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귀휴당집(歸休堂集)』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