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나림(那林). 경상남도 하동 출생. 1941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문예과를 졸업하고, 이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불문과에 진학하였으나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퇴하였다. 한때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지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1948년 진주농과대학 강사, 1951년 해인대학(海印大學, 현 경남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이 대학에 재직중인 1953년, 32세 때 첫 장편소설 「내일 없는 그 날」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였다. 이는 당시 부산일보 논설위원이었으며, 훗날 문화방송 사장이고, 함께 필화사건에 걸려 옥고를 치르기도 한 황용주(黃龍珠)와 편집국장 이상우(李相佑)가 합심하여 지방신문소설을 육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게 한 것이다. 그로서는 중앙 문단에 데뷔하기 전 첫 작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1955년부터 부산 국제신보 편집국장 및 주필로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으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하였다. 2년 7개월 만에 출감한 뒤 서울로 옮겨 한국외국어대학과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맡았다.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5년 중편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세대(世代)』에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는 시인 신동집(申瞳集)과 문학평론가 이광훈(李光勳)의 강력한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정치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다원적인 문제를 새롭게 접근하여, 처음 발표되자마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계속하여 「매화나무의 인과(因果)」(1966)·「마술사」(1967)·「쥘부채」(1969)와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1970)·「망향」(1970)·「여인의 백야(白夜)」(1972∼1973) 등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관부연락선」은 일제강점기부터 6·25까지의 한국 지식인들을 역사적 방법으로 다룬 점에서 문제작으로 꼽힌다. 그 뒤 죽을 때까지 한 해도 빠짐 없이 중·단편을 발표하거나 또는 신문·잡지 등에 장편소설을 연재하였는데, 그 안에 펴낸 소설집만도 60권 이상이 된다.
「마술사」·「관부연락선」 외에도 「예낭풍물지」·「지리산(智異山)」·「바람과 구름과 비(碑)」·「산하(山河)」·「행복어사전」·「무지개연구」·「그 해 5월」·「니르바나의 꽃」 등 기록될 만한 많은 작품이 있다.
그의 문학은 역사와 시대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좌·우익의 대립, 그리고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거의 지식인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지리산」의 이데올로기 문제와 비극적 인간들, 「변명(辨明)」의 젊은 지식인들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했던 역사를 위한 변명들, 그리고 마지막 미완의 작품인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일본 유학생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고등학교 교사에서부터 대학교수, 신문사 편집국장·주필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력은 다양하다. 그런가 하면 일본 유학, 학병, 중국대륙에서의 졸병 생활, 국회의원 입후보, 정치범으로 몰린 2년 7개월간의 감옥 생활 등 그가 겪은 역경도 특이하다.
말술을 사양하지 않는 호방한 성격에다가, 박학다식하며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교우 관계 등도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특징이다. 1976년 장편 「낙엽」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중편소설 「망명의 늪」으로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