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는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주 군주, 병부령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신라에서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가 설치되자 그 곳의 군주가 되었고, 512년(지증왕 13)에는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541년(진흥왕 2)에 병부령이 되어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545년 왕에게 건의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하는 틈을 타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다. 이 때 이사부는 그 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 · 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의 하나였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 ·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년(진흥왕 10) 전후에 이찬이사부는 파진찬두미(豆彌)와 아찬비차부(比次夫) · 무력(武力 : 김유신의 할아버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旃檀門)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 후, 이사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흥왕의 재위 20년대 말에 세워진 순수비를 보아도 이사부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그를 뒤이어 크게 활약한 거칠부가 가장 먼저 나오고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진흥왕의 재위 20년대 중 · 후반의 어느 때에 은퇴했거나 사망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