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 이인(李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운손(李雲孫)이다. 아버지는 참봉 이정려(李精藜)이며, 어머니는 유경인(柳敬仁)의 딸이다.
성품이 호매(豪邁)하며 남에게 구애되지 않았다. 17세에 비로소 독서에 열중하여 문을 닫고 널리 경사(經史)를 고구(考究)하였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4년 병조좌랑에서 면직되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이 되었다.
1596년 북청판관에서 함흥판관으로 옮겼으며, 1601년 여산군수를 거쳐, 1604년 합천군수·사헌부지평을 지내고 판결사와 분조(分朝)의 병조참판에 올랐다. 2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그림에도 뛰어나서 진중에서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