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1년(공양 3) 11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지평으로서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집의 정희(鄭熙), 장령 김무(金畝)·서견(徐甄), 지평 이작(李作) 등과 함께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에게 죄줄 것을 청하는 한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오사충(吳思忠)을 탄핵하여 귀양가게 하였다.
그 해 대간인 조준·정도전에 대한 탄핵이 정몽주(鄭夢周)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하여 정몽주가 살해된 뒤 4월 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정희·김무·서견·이작 등과 함께 귀양 갔다. 1392년(태조 1) 7월 즉위교서에 의해 직첩을 회수 당하고, 장 70에 원지유배(遠地流配)의 처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