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희성(希聖). 고려의 문신인 이집(李集)의 5대손이며, 대사간 이예손(李禮孫)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통례원통례 이극견(李克堅)이고, 아버지는 증 참판 이남(李擥)이며, 어머니는 목사 이승원(李承元)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곤궁했으나, 뜻을 세우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중종 3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홍문관정자에 선임되고 이듬 해 다시 탁영시(擢英試)에 병과로 급제해 왕의 총애를 받아 박사·수찬·정언·지평 등을 지냈다.
1544년 시독관(侍讀官)·교리를 거쳐 사복시정에 승진해, 이듬 해 『중종실록』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 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응교로 있을 때 명종의 즉위와 함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아 지방관과 한직으로 밀려나 9년을 지냈다.
다시 등용되어 교리·직제학·승지·종부시정·이조참의·형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1567년 첨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68년(선조 1) 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 편찬을 지휘하였다. 그 뒤 파직되었다가 1570년 서용되어 한성부좌윤을 역임한 뒤 예조·형조, 공조참판, 개성유수 등을 두루 지냈다.
경연에 나가 시강할 때에는 풍부한 학식과 맑은 음성으로 왕의 칭송과 상을 받았으며, 옥사를 다스릴 때에는 판결이 분명하고 변동이 없어 법정이 숙연했다 한다. 그리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민폐를 덜고 생활을 안정시켜 백성들이 칭송했다 한다. 태종의 외예(外裔: 외가쪽 후손)라 해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