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열(伯說), 호는 십탄(十灘). 아버지는 사복시첨정 이성조(李成朝)이며, 어머니는 증찬성(贈贊成) 조상정(趙相靜)의 딸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이다.
1710년(숙종 36)에 음보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이 되고,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714년 정읍현감이 되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하여 풍속을 순화하였으며, 이후 종묘령(宗廟令)에 승진되었다. 1718년 인제현감이 되어 3세(稅)를 감면하고 선정에 힘쓰자 김창흡(金昌翕)이 글을 지어 칭송하였다.
이 후 대구판관으로 옮겨 민폐를 제거하고, 이어 함양군수를 지냈다. 1725년(영조 1) 의성현감으로 나가 흉년의 백성들을 구제하고, 1727년 부평부사에 승진되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뒤에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가평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12탄(灘)이 있었으므로 호를 십탄이라 하였다.
1731년 다시 사복시첨정이 되어 『마의방(馬醫方)』을 간행하고, 이를 잘 익힌 자를 마의(馬醫)로 임명하게 하여 이후 준례가 되었다. 1733년 원성현감이 되어서는 향약 12조문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였다. 순찰사의 보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칭찬하였다.
1735년 첨지중추부사·오위장·돈녕부도정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결사·동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한성부우윤·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이어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늙은 음관(蔭官)으로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1743년 부사직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